임명룡이 만난사람 6 - 김광원 전 마사회장



세 개의 코미디가 한국정치의 현주소

정치를 그만둔 이유, 악성 소문과 달라

울진이 '별의 노래' 이미지 선점했으면...

 


“고향 울진사람들이 많이 궁금해 하십니다. 객지에서 울진을 빛낸 분 중에 손꼽히시잖아요.” 찾아뵙게 된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겸사로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우리 같은 사람이 울진을 빛낸 것이 아니지요, 김명인 시인, 김혜순 시인 한상봉 화백 이런 분들이 울진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울진을 빛낸 분들이지요.” 뜻밖의 이름들을 들은 탓에 귀가 뜨끔했다.

사실 그분들만큼 유명한 시인이나 화가는 대한민국에 별로 없지만, 문학이나 미술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기도 하다. 그만큼 김광원 前 마사회 회장은 문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다. 덕분에 문학 이야기로 인터뷰가 시작되었고, 김명인 시인과 김혜순 시인 그리고 김 회장의 사돈인 오탁번 시인을 이야기하는 밤이 되었다.


                                                                 /임명룡 서울지사장


근황은 어떠신지

“용인에서 가족들과 어울려 살고 있는데, 놀고, 먹고, 자고, 빈둥거리고, 걷고, 책 읽고, 사색하고 이것이 요즘 내 생활입니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자녀들이 결혼을 하여 손자, 손녀가 일곱이다. 회장님 부부까지 모두 15명의 대식구가 사는 데, 부근에 어울려 살며 1주일에 한번은 다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한다고 했다. 식구수가 많아지면서 한 끼 외식을 책임져왔던 회장님의 지출도 커져서 요즘에는 최대한 식대비가 저렴한 칼국수집이나 해장국집으로 간다며 웃었다.

김 회장은 평생 검소하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며, “국회의원 연금 120만원이 용돈이자 개인 생활비입니다. 월수입 3백만 원이 넘을 경우, 국회 연금이 지급되지 않는데 연금이 나오는 것을 보면, 전체 수입이 2인 가구 최저생계비 정도라는 소리지요. 하하” 늦게 손자 손녀를 본 까닭에 아직 김 회장 부부가 아이들을 돌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힘에 부쳐 가끔 도우미의 도움을 받지만, 그것도 저녁 한끼만이라고 했다. 그래도 여유롭게 사는 지금이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은퇴를 한 후에 생긴 여유로움은 삶의 긍정성이 살아나서 입맛까지 회복되더라는 것이다.

덕분에 평생 잔병치레를 달고 살던 건강이 몰라보게 달라졌으며, 당뇨와 하지정맥도 상당히 완화되어 지금은 일상에 불편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울진에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왕래하는데, 주로 사모님이 운전을 한다. 고향에는 오래전에 살던 초가삼간이 그대로 있고 그런 고향이 너무 좋다고 하셨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시고 공무원이 되셨는데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동네 10리 밖을 나가본 적이 없지만, 선친께서 대구시를 오가며 건조 오징어를 위탁판매 한 덕분에 고등학교를 대구로 진학할 수 있었어요.” 대학까지 보낼 생각이 없었던 부친과 협상 끝에 대한민국에서 어려운 대학에 합격을 하면, 보내준다는 조건으로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서울대학교 합격자 발표는 라디오에서 수험번호를 불러주었는데, 기성에는 잡음 때문에 라디오로 확인할 수가 없었어요.

다음날 신문을 보고 합격한 걸 알았어요.” 그렇게 들어간 서울대 법대 행정학과였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마음고생을 많았다고 한다. 졸업 후 공군학사장교를 지원하여 공군사관학교에서 4년간 장교로 근무하게 되었다. 행정고시를 통과한 군 동기생의 강의를 들으며, 준비한 행시에 합격했을 때는 서른에 가까운 나이였다.


구자춘 경북도지사와의 인연이 궁금

“살다보니 운이라는 게 있더군요. 구자춘 도지사님을 만난 게 그런 경우예요.” 경북도청 법제계장으로 근무할 때인데, 야근을 하는데 구자춘 도지사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도지사께서 젊은 김계장을 불러놓고 질문을 던졌다. “자네, 대한민국의 국시(國是)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당시로서는 혁명공약에 명시된 대로 ‘반공’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마땅했지만, 김계장은 “민주주의입니다.”라고 했다.

의외의 대답에 놀란 도지사는 구체적으로 왜 그런지를 물었고, 김계장은 “국시는 나라의 큰 목표입니다. 인권과 생존이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국시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했다. 도지사께서 그 자리에서 노발대발하셨지만 속으로 어떻게 판단했는지는 알 수 없었고, 아무튼 눈에는 확실히 들었던 모양이었다. 얼마 후, 진급 대상 후보명단에도 없던 김계장이 과장으로 진급했다.

인사계장이 올린 후보명단에서 도지사는 인사계장 발령 대상자의 이름을 볼펜으로 지우고, 당시 김 계장 이름을 물어서 그 자리에 적어 넣더라는 말을 인사계장에게 들었다고 한다. 그 후 구자춘 도지사께서 내무부로 보내어 내무부 행정계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또 구 도지사는 서울시장을 거쳐 내무부장관에 올랐고, 김 계장은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금릉군수로 발령이 났다. 그때가 만 37세였다. 이후 김천시장, 강릉시장, 경상북도 부지사 등을 역임했다.


국회의원이 된 계기가 있다면

“금릉군수로 있을 때 윗사람으로부터 면장임명 청탁이 들어왔는데 거절했어요. 그 분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식탁을 엎어버리고 말았지요. 청탁을 했던 사람이 나를 전두환 대통령을 비판했다며 내무부에 투서를 했습니다.

그래서 공무원교육원장으로 좌천됐어요. 좌절했지요.” 한편 당시 사회적 흐름은 선거로 지방자치단체장을 선출해야 한다는 분위기로 가고 있었다.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공무원교육원은 인맥관리에 상당히 유리한 입장이었다. “좌절에서 꿈을 키우라.” 처음으로 선거에 욕심이 생겼다고 한다. 경상북도지사를 목표에 두고 일단 국회의원에 도전하였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16대, 17대 선거를 거쳐 3선 중진의원으로, 또 농림해양수산위원장을 맡아 활약했다. 2007년에는 한나라당 경북도당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한나라당 사무부총장으로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에 큰 역할을 하였다.


갑자기 은퇴를 결심한 이유

“선거를 자꾸 하다보니 가족들이 선거피로증후군으로 힘들어 했어요. 또 고향분들을 만나러 가면서 무의식적으로 득표수를 계산하는 자신이 크게 잘못되었구나 싶더군요. 빨리 본래의 내면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일흔이라는 나이도 부담이 되더군요. ” 선거를 안 해도 되는 공직을 의식했고,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역할이 컸기 때문에 내심 건설교통부 장관 정도 배정을 기대했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 이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고 한다. 포기를 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는데, 수개월이 지난 후에 마사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에 떠돌던 소문에 대해서도 여쭈었다. “소문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전혀 근거가 없어요.” 대가를 받고 불출마를 했다면 보상이 있어야할 텐데 없었어요. 강석호 한나라당 경북도당 상임부위원장에게 지역구를 인계하게 된 이유는 첫째로 마땅히 인계할 사람이 없었고, 둘째는 당시 친이계와 친박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이라 계파를 무시할 상황이 못 되었다는 것이다. 해당 지역구에는 친이계가 없었다는 말도 된다.

셋째 이유는 강석호 도당상임부위원장은 7년간이나 그 직책을 맡아 도당의 뒷설거지를 다 했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왔기에 그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일체의 뒷거래가 없었고, 그 어떤 곳에서도 압력이 없었다며, 농담으로 “나중에 주었으면 받았을 지도 모르는데 안 주더라고. 하하”


정치를 하면서 업적이나 아쉬움이 있다면

“아쉬움만 남는 게 정치입니다. 잘한 건 기억에 안 남고 못해낸 것만 남아요.” 김 회장은 행정수도 이전을 막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아픔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좁아서 행정수도가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옮기게 되면 수도 전체가 이전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지금 세종시는 ‘거대한 출퇴근용 출장지’다.

공무원들이 세종시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 살면서 SRT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업무도 세종시에서 행정적 절차가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니라서 결재를 받기 위해 서울과 세종시를 오간다. 비효율의 극치이며 앞으로도 큰 골칫거리다. 그것을 예상했기에 반드시 막고자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북한의 경제발전을 보수가 선점하지 못한 것도 너무 아쉬워요.” 김 회장님은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어 통일로 가는 길을 모색했다고 한다.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변형하여 북한형 새마을 사업을 하고자 했다. 굶주림 해결이 급선무인 북한을 먹고살게 하여 개방으로 이끄는 방법이라고 했다.

“땔감을 나무에서 연탄으로 교체하여 산림을 보호하고, 하천범람을 막는 경지정리와 농업용수개발이 시급합니다. 다수확품종 보급으로 생산량을 확대하고 거주환경을 개선하여 질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등은 우리가 이미 경험했던 것이라 어렵지 않습니다.” 김 회장은 ‘북한지원법 제정’을 촉구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현재 한국정치의 시급한 문제를 꼽는다면

“최근에 있었던 웃지 못 할 코미디가 세 개 있어요, 원전이 위험해서 탈원전을 한다면서 체코에 가서는 대한민국 원전이 가장 안전하다고 선전했는데, 체코 대통령은 외국에 나가고 없었어요. 두 번째 코미디는 연봉 1억을 받는 자동차 노조에 주휴수당을 추가하지 않으면, 최저임금법에 걸린다는 황당한 규정이고요, 세 번째는 자신은 위장전입을 세 번씩이나 했으면서 다른 사람은 위장전입을 했다고 실형을 선고한 판사가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되더군요. ”

김 회장은 현재 한국정치는 심각하다고 했다. “법관 출신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잘하지만,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는 서툴러요. 나라의 근본은 경제와 안보, 그리고 에너지인데 경제도 안보도 에너지도 지금 무너지고 있어요. 큰일입니다.” 소통의 부재도 큰 문제라고 했다. 키케로의 말을 인용하여 “상대의 잘못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자신들만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책은 실패할 수 있어요, 다만 어리석은 왕은 자신의 생각을 고치지 못하는 왕입니다. 잘 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위대한 진보고 개혁입니다. 꿈과 희망이라는 아이는 관용과 축복 속에서 자랍니다. 매일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되는 곳에 꿈과 희망은 죽고 맙니다.”

또한 김 회장은 지금 한국의 시급한 문제는 규제의 혁신과 미세먼지 해결을 꼽았다. “규제를 없애는 데 총력을 쏟아야 해요, 규제를 혁신하는 혁명적 사고 필요합니다.” 김 회장은 내무부 행정계장으로 재직할 때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울진에는 두 군데 온천이 있어서 온천에 관한 법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부관리규정에 의하면, 특정한 규정이 없는 경우 총무처 소관이라 서류를 총무처에 보냈다. 총무처는 온천수가 지하에서 생산되는 지하자원이라 하여 상공부 소관으로 보냈다.

상공부에서는 온천이 국민건강과 관련된다며 보건복지부로, 복지부는 온천수라도 결국 농업용수로 이용되니 농림수산부로 서류를 이관했다. 농수산부는 온천은 그 지역이 관할한다는 이유로 지역행정에 넘겼고, 지역행정은 내무부 소관이라 하여 서류가 내무부로 되돌아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온천법은 지금도 내무부(행정안전부) 소관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공무원 한 명이 규제 하나입니다. 현 정부가 공무원을 늘리는 것에 절대로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툭하면 핸드폰 압수 검열하는 마당에 복지부동 나무랄 수도 없어요.”

미세 먼지는 중국과 국교를 걸고 담판을 지어서라도 해결해야 할 당면한 문제라고 했다. 자꾸 끌려다니지 말고 당당하게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고향 울진에 대해서 한 말씀

“가장 울진적인 것이 울진의 미래입니다.” 김 회장은 지금 울진은 인프라가 거의 완성단계에 있다고 했다. 이제는 개발과 병행해서 현대적인 울진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키우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원전보조금 등을 활용하여 세계적인 학교를 설립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최고의 교육은 최고를 가르치는 교사에서 나옵니다. 원어민 교사를 확보하여 원어로 가르칩니다. 우수한 인재가 양성되면, 그들을 고용할 우수한 기업을 유치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울진만의 쉼터를 곳곳에 확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쉼터에는 울진 출향인들이 기증한 책들이 빼곡하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울진이라는 곳을 쉴 수 있는 땅, 사람다운 사람들이 사는 곳, 사람 냄새가 나는 땅을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요즘 시중에 베토벤 음악을 듣고 사는 소에서 나온 우유, 조용필 노래를 듣는 닭이 낳은 달걀 이런 게 있던데, 내가 젊다면 울진에서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우리 아악(雅樂)을 듣는 닭들이 낳은 달걀” 울진의 맑고 깨끗한 환경을 이용하여 ‘별의 노래를 듣고 자란 채소’, ‘별의 노래를 들으며 익은 쌀’ 그런 울진만의 상품을 선점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김 회장은 ‘농사’의 ‘農’에서 윗부분 ‘曲’이 노래를 의미한다고 했다. 따라서 曲과 辰이 합쳐진 ‘農’은 별의 노래를 듣고 자라는 곡식을 뜻한다고 했다. 실제로 시경(詩經)의 모전이나 국어 같은 고전에 ‘樂章을 曲이라고 한다’ 는 내용이 있지만, 김 회장께서 그것까지 알고 계시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그리하여 문학으로 시작된 인터뷰는 그렇게 문학같이 끝을 맺었다.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