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농모 배동분의 세계여행기 3편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한 줄의 이야기가 전부인 이 작은 마을에

각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헤르만 헤세는 빵 한 조각, 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수영복 한 벌을 가방에 챙기면 떠날 준비가 끝난다고 했는데, 나의 여행가방은 이민가방처럼 언제나 미어터질 지경이다. 이 하나만 봐도 아직도 욕심껏 끌어안고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어 부끄러워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행을 떠나는 횟수가 고봉으로 쌓일수록 점점 짐이 줄어들고 있다는 거다.

포르투갈하면 대서양으로 나가는 관문인 까닭에 과거 많은 식민지를 건설했고, 대항해시대의 화려한 영광과 번영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은 그 영광도 우리네 인생사처럼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오래가지 못하고 빛을 잃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약 1시간정도 달려간 까보다로까(Cabo da Roca)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유럽의 명소>로 뽑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꽃보다 할배-스페인편>에서 배우 신구 선생님이 다른 일행과 떨어지면서까지 혼자 포르투갈로 와 이곳 까보다로까에 들렀다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감동이 어떤지 감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인해 예부터 영국과 스페인의 귀족들이 휴양지로 찾았다고 한다. 지금도 까보다로까 근처에는 세계 갑부들과 호날두 등 세계적인 스타들의 별장이 있다고 하니, 자연 조건과 뷰가 어떤지는 찍어먹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땅끝마을 까보다로까는 지상에서 가장 눈부신 풍경을 간직한 곳이다.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한 줄의 이야기가 전부인 이 작은 마을에 각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서쪽 끝인 포르투갈 까보다로까! 유라시아 대륙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그 의미 하나로도 사람들을 끌기에 충분함을 보여주는 곳이다.

유럽에서 3번째로 오래된 등대가 머리에 빨간 모자를 덮어쓰고 이방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높이 150M의 깎아지른 듯한 화강암 절벽 위의 빨간 등대는 인생이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가슴 속 어딘가에 인생길을 안내하는 등대 하나씩은 품고 있다고 말해주는 듯 서있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돌탑 하나. 돌탑 꼭대기에는 하얀색 십자가가 올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16세기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서사시인 카몽이스(Camoes)의 “여기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라는 시구가 새겨져 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바다는 시리도록 파랬다.

그곳은 어떤 관광지와 달리 여행객들은 말이 없었다. 각자의 삶을 되새김질하는 게 아니었을까. 나도 그랬으니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으로 내달린다고 누가 그랬듯이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이 늘 공존하는 게 인생이 아닌가 싶다.

까보다로까 역시 ‘시작과 끝’을 쉼 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에게 절망이 오면 그것은 희망이 멀리에 있지 않음을 알라는 듯 대서양의 높은 파도를 그대로 맞고 있는 절벽과 등대, 선인장 꽃들이 증명하고 있었다. 이처럼 여행은 온몸으로 삶을 배우는 것임을 알기에 나는 죽으나 사나 떠나는 것이다.

등대 앞으로 보이는 살벌한 절벽 위 너른 초원에는 키 작은 선인장꽃과 이름모를 작은 꽃들이 흰떡국 위의 오색 고명처럼 자라고 있었다. 거지 발싸개 같은 삶이라도 분명 햇살은 비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듯 바다로부터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노란 꽃들이 제 몸에 겨워 흔들렸다. 작은 꽃들 사이사이로 사람들은 땅 끝자락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관광객을 홀리기 위해 일부러 줄지어 심어놓은 것에 식상한 사람들은 그 소박한 꽃 주위를 오래도록 서성였고, 그것이 오솔길이 되어 또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계획된 것, 인위적인 것, 계획적 호객행위에 진절머리가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까보다로까는 솔직히 다른 유럽 여행지처럼 웅장한 성당도 없고, 박물관도 없고, 화가나 음악가의 고향도 아니다. 달랑 등대, 돌탑, 키작은 선인장, 기념품 가게, 거기에 말을 탄 경찰이 전부다. 그럼에도 그곳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에 여행자들은 귀를 기울이고 삶을 돌아본다는 것에 포인트가 있는 곳이다.

“이곳으로만 걸으세요“ 라고 못박은 듯 인위적으로 늘어놓은 데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걸어서 만들어 놓은 오솔길이 전부다. 절벽 아래로 떨어질 위험성을 고려해 얼기설기 나무로 난간만 죽지 못해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모든 것이 자연에 위배되지 않는 풍경이 되도록 ‘방치한 것’이 사람마음을 홀리게 하는 곳이다.

우리네 관광지를 가보면 자연과의 조화가 결여되어 아쉬움으로 남는 곳이 많다. 어디를 가도 데크 천지다. 건축물과 시설도 규모에 열을 올릴 뿐 그 곳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없고, 주위 경관과의 조화에 위배되는 곳이 많다.

사람들이 유럽으로 유럽으로 앞다투어 나가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적 아름다움과 역사와 건축물이 조화롭게 공존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관광에 있어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터키 이스탄불의 ‘피에르 로티 카페’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다.

또 다시 여행가방을 싸는데 지인이 물었다. 왜 그렇게 죽으라 여행을 가냐고? 죽으라 가는 게 아니고 살라고 간다고 하며 웃었는데, 이만큼 좋은 답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여행하는 이유는 내가 나를 알기 위함이고, 내 색깔을 갖고 뚜벅뚜벅 내 길을 잘 가기 위함이다.

*배동분은 한국생산성본부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다가 2000년에 금강송면으로 귀농했다. <산골살이, 행복한 비움>과 <귀거래사>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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