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울진중학교에 계셨던 아버지의 전근으로 강릉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고향을 떠났으니 출향인이 된지 근 45년이 되는군요. 강릉에 살 때는 그래도 방학 때면 가족모두 버스를 타고 친가와 외가가 있는 평해와 후포를 다녀가곤 하였습니다.

 

 험한 동해안국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면 바로 밑이 바다여서 그만 가슴이 서늘해오던 기억이 납니다. 점심으로 먹었던 김밥 때문에 식중독에 걸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도 가려움을 참으며 고향가는 기쁨에 들떠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월송과 금음리 바닷가 등에서 수영을 하면서 성게를 잡아먹기도 하고 물안경끼고 물고기 노는 모습도 보고 이런 즐거움에 방학만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이 때는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몰랐고 그냥 자연과 동화된 생활이었는데 요즘 학교갔다 학원갔다 공부만 매달리는 아이들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서울로 이사온 후로는 고향이 너무 멀어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1학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월송에 혼자 계시는 할머니를 뵈러 고향을 찾게 되었습니다.

 

청량리에서 열차를 타고 안동에서 내려 비포장된 도로를 버스를 타고 영덕을 거쳐 고향에 닿았는데 새벽에 떠나서 해질무렵에 도착하였습니다.

 

통통 뛰는 버스 때문에 허리가 무척 아팠었습니다. 요즘은 승용차로 포장된 도로를 36번 국도를 이용하여 가도 되고 고속버스를 타고 강릉, 삼척을 경유해 가도 되고 비행기를 타고 포항에 내려 무정차  타고 올라가도 되니 고향 가는 길이 너무 편해졌습니다. 기성에 공항이 완공되면 더 빨라지겠지요.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과 같이 오랜만에 고향 바닷가에서 놀려고 하니 올리브 태풍이 불어 가로수가 통째로 뽑혀 나가고 논밭이 물에 잠겨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건너 마을 작은 할아버지댁에 갔다가 돌아 오면서 할머니를 등에 업고 논두렁을 걷다가 하마터면 바다로 쓸려갈 뻔 하였던 아찔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태풍이 불어 고향에 큰 피해를 주니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후 고향친구인 전종술 (지금은 전주에 살고 있음)을 만나러 울진읍으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성류굴을 답사하고 내친 김에 걸어서 왕피천 하구에 있는 망양정에도 올라가 보았습니다. 걷는 도중 원두막에서 사먹은 참외는 달고도 시원하였습니다.

 

아마도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한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왕피천과 바다가 만나는 다소 높은 야산에 지어놓은 망양정!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천하의 절경이었습니다.

 

보고 싶었던 친구와 만나 어릴적 늘 가서 놀던 연호정에 갔습니다. 구수한 연꽃 열매를 따 먹던일, 보트 타던 일들이 기억 나더군요. 친구와 죽변에 올라갔다가 울진으로 내려오면 돈이 떨어지고 허기가 져서 어느 집에 무턱대고 들어가 ‘아지매 밥 한 끼 주쇼’애걸 하였더니 바가지에 밥을 담고 김치를 가져와 마음껏 먹으라고 하는 아줌마의 마음씨는 비단결이었고 고향의 순박함이었습니다. 그렇게 고향을 다녀온 후로는 누가 무장공비 나타난 벽지라고 놀려대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험준비를 하느라 경기도에 있는 극락사라는 절에 갔을때인데 그곳에서 처음 만난 어느분이 식사 도중 (고시생이 10명이 넘어 연배가 높은 분들이 식사하는 상과 우리들이 밥을 먹는 상이 달랐는데 형님들 상의 한 분) ‘손씨는 고향이 어디요’하기에 ‘울진입니다’하였더니 울진 말씨같아서 물어보았다며 ‘나는 죽변이요’하시지 않겠습니까. 고향을 떠난지 18년이 넘었는데 말씨가 그대로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그 분은 곽중동 형님으로 죽변에 살고 계신데 지금도 푸근한 고향형님입니다).

 

 또 그 절의 주지스님에게서 들은 즉 “내가 오대산 상원사에 있을 적에 울진,삼척지역에 침투한 공비들이 북상하면서 상원사에 있던 스님을 일렬로 세워 모조리 대꼬챙이로 꿰어 죽이려 하는 것을 그 절에 잠시 공부하러 왔던 어느 대입재수생의 기지로 죽임을 면하고 그 학생이 끌려가면서 표식을 해 무장공비들이 일망타진 되었다” 라고 하였습니다.〈고 이승복씨의 명복을 빕니다〉

 

여러 번의 낙방 끝에 겨우 시험에 합격하여 초임을 대전에서 마치고 1988.9.1 영덕지청으로 근무발령을 받음으로 다시 고향을 찾게 되었습니다.

 

많이 변한 고향의 모습이었습니다. 도로가 포장되어 있었고 여름철이면 서울,대구,부산 등지에서 피서객들이 몰려들어 특히 백암온천은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더군요. 반라의 젊은 남녀들이 외제차를 몰며 혼숙을 하며 수백만원 짜리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은 선량한 우리 고향사람들에게 많은 마음의 상처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외지 관광객이 많이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더덕을 길가에 놓고 파시던 어느 할머니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새로 지은 망양정에도 가보고, 성류굴도 다시 가보았습니다. 왕피천 은어는 채포가 금지된 것인줄 알면서도 별미라고 이름이 높기에 강변 포장마차에서 파는 튀김을 먹어보았습니다.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불영사에도 가보게 되었는데 왕피천을 따라 불영사로 들어가는 계곡은 아시다시피 경치가 무척 좋습니다. 그냥 속세를 잊고 이 계곡에서 살았으면 싶더군요. 하루는 그 아름다운 계곡에 변사체가 발견되었고 유족들이 타살이라 주장하는 바람에 부득이 부검을 하게 되었는데 엄지손가락 만한 파리들이 날아들더군요. 이런 천하 절경에 왠 파리인지?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였는데 이왕 세상을 하직할 바에야 경치 좋은 곳에서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봅니다.

 

1년 근무를 마치고 고향을 떠났는데 그 후 10년만에 다시 찾은 고향은 불경기의 여파로 많이 침체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백암온천에 가보아도 한산 하더군요. 고향에 못 가본지 벌써3년이 되어갑니다만 최근 대게축제, 온천축제, 친환경농업엑스포 등의 행사를 울진신문이나 울진21, 인터넷 등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지역 경제를 살리려는 노력이 부디 결실을 맺어 고향이 풍요롭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신문이나 인터넷이 있으니 향수는 덜 합니다만 희뿌연 서울하늘을 바라보면 문득 고향의 청청한 하늘과 바다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내고향이건만 쉬이 찾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고달픈 삶을 살아가느라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평해읍 월송리 출신,

울진초등학교1년 다님(1961년 입학), 원주중, 경기고, 서울법대 졸업,

사법시험24회 합격, 대전, 영덕, 부산지검 검사 역임,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서  변호사 개업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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