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구출향인 성부산업 장진만 사장

 

세 번의 파산에도 다시 일어서 한국 농기계 산업계 중견기업인으로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고... 그는 세 차례의 큰 좌절을 맛보았다.

 

지금 그는 IMF의 위기를 극복하고, 칠곡 왜관산업단지에 공장을 매입하여 입주, 번창 일로의 중견기업 틀을 갖추었다.

 

부지 1천평에 공장건물 약 6백평, 전자동화 최신 기계시설비에 개발 설계요원 2명 포함 직원 12명이 농기계 약 10여 종을 생산하고 있다. 그의 공장에서 개발한 곡물이송기, 논두렁조성기, 비료살포기, 콩탈곡기, 비닐피복기 등 10여 종은 거의 모두 특허제품으로 기존의 농기계들보다, 편의성 안전성 능률성면에서 뛰어나다.이렇게 성능이 뛰어난 제품들은 장사장의 머리에서 아이디어가 나오고, 연구개발실에서 약 5억원을 들여 구입한 최신의 고가 전자제어판금기를 이용해서 개발된다.

 

그가 개발한 곡물이송기는 전국시장의 약 60%를 점유해서 연간 약 1천대 씩을 판매한다.

금년에 처음 출시하는 특허제품 논두렁조성기는 기존의 제품보다 성능은 우수하지만 가격을 1/3로 낮추어 이미 4백 대의 공급주문이 들어 와 있다.

또한 금년에 첫 시판에 들어가는 콩탈곡기의 인기도 높다. 기존 제품들의 탈

곡 중 콩이 깨어지는 약점을 완전히 보완했기 때문이다.

 

그는 5년 전 중국 요령에 1년간 임대 상설전시장을 열어 중국시장을 개척해 왔고, 현재 일본에는 농기계부품을, 필리핀에는 정미기를 수출하고 있어 국제시장의 문호를 열어가고 있다. 지금은 남부러울 게 없는 장사장. 그러나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고뇌와 역경은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다. 역경과 좌절 그것으로 하여금 오늘의 장사장을 있다고 보면 그의 실패의 극복은 더욱 값진 것일 수도 있다.

 

장진만(57세) 사장 그는 울진읍 호월리 무월 출신이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가 작고하면서 살림은 거덜이 났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갈 곳이 없었다. 빚에 살던 집이 넘어갔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누님 세식구는 감자와 꾹죽으로 연명했고, 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는 지게로 30~40리나 떨어진 악구산에 가서 땔감을 해서 읍내 장에 내다 파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호월리 마을에 국민학교를 졸업했던 8명의 동기 중 자신을 빼고는 모두 중학교에 진학하는 쓰라림은 지금도 그 당시처럼 쓰라리다.

마침 울진국민학교에서 중학교 진학을 하지못한 학생들을 위하여 1년간의 중학과정 야간반이 생겼다. 지금 대구에서 사업에 성공한 장격씨도 처지가 비슷하여 같이 공부하여 지금도 특별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이 때 그의 피지 못한 향학열은 손에 잡히는 무엇이던 탐독을 하는 습관을 만들었고 이후 사회생활과 사업 경영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18세가 되어 그는 태백 탄광촌으로 가 선탄장에 취직을 하여 배달 등의 일을 하다가 희망이 없어 서울로 가 10여년간 유통회사에 취직 수금사원에서 영업부장까지 지내며 이 때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영업부장 자리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실 수 밖에 없어 건강이 걱정되어 누님이 살고 있는 대구로 내려와 상점을 열고, 우유배달 보급소를 운영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두달간 입원하면서 서울에서 약간 벌어 온 돈을 다 까먹고 모친과 가족들을 데리고 사글세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고...

 

첫째로 그에게 닥친 시련이었다. 그는 당시 한창 바람이 불던 중동건설현장의 인부모집의 기회를 잡아 사우디 건설현장에 잡부로 1년간 취업했다.

 

귀국 후 운전을 배워 택시 등 차 운전직을 하다가 우연히 밭뙈기 농산물 판매상을 하여 약간의 돈을 벌었으나, 결국 사기꾼에게 걸려 또 한번 빈털터리가 되었다. 두 번째 시련이었다. 80년 경 우연히 가정용 정미기와 사료절단기 등을 차에 싣고 농촌을 떠돌며 판매하는 장사를 시작했는데, 5~6년 간은 판매가 잘되었다. 이 때 그는 숱한 농기계들을 접하며, 농민들의 불편과 애로점을 알게 된 것이 현재의 신제품 개발의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었다.

 

새마을금고에서 3천5백만원의 돈을 빌려 정미기 케이스 특허개발자와 감산동에다 제조공장을 차려 10여년간 사업이 잘되어 성서공단에 250평 규모의 공장을 차렸는데, IMF 외환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6억원의 부도를 맞으면서 또 한번 그의 사업은 내동댕이 쳐지고 말았다. 이것이 그에게 다가온 세번째의 좌절이었다.

 

그러나 장사장의 정직성을 알고 있던 원자재 공급처에서 그의 인간적인 신망을 담보로 외상으로 원자재를 공급해 주었고, 3년전 특허제품인 곡물이송기가 대박을 터뜨려 재작년에 원상을 회복하고 지난해 현재의 공장을 매입 입주했다.

 

그는 어려움이 닥칠 때 마다 반드시 자신은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어린시절을 겪어 온 장사장. 그의 성격은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인정이 흐른다.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찾아 온 걸인이나, 행상들에게 한 번도 그냥 돌려 보낸 적이 없다고...

 

연중 한두번 고향을 찾을 때 마다 노인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빼먹지 않고 있는 그는 재구군민회 10년간 이사를 역임해 왔는데, 최근에는 재구울진읍민회 2대 회장을 맡아 봉사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의 인터뷰 마지막 말...나이가 들면 고향 갈 겁니다.

 

전병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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