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 원장의 민담순례 6


 

기성면 척산리에서 평해 방향으로 커브를 돌면, 울진비행장 올라가는 입구에 (정명리 산 26-1) 아담한 비각이 하나 있다. 비각 내부에는 효자 안응준과 안망문의 처 열여 남씨 비석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 비석은 1873년(고종10) 안씨 문중에서 세웠다. 효자 안응준에 대한 이야기는 울진군지를 비롯해 여러 효자전 등에 소개되어 있으나, 그 근원은 이산해의 「아계유고」이다. 아계유고 기록 중 안응준 효자에 관한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성은 안(安)이요 이름은 응준(應俊)이라는 이가 평해군 황보리 남쪽 재 아래에 산다, 안씨의 세계(世系)는 순흥(順興)이고 응준은 측실 소생이다. 그는 겨우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절명하였다,

두 동생이 있었는데, 아래 동생은 겨우 말을 배우는 참이었고 막내는 강보에 있었다. 갑자기 어머니가 숨이 끊어지자 응준은 말을 알아 듣지도 못하는 두 동생을 어루만지며, “나는 이제 어머니를 따라 죽을 터인데, 너희들은 장차 누구에게 맡길꼬!” 하면서 울었다.

‘옛말에 손가락 피가 죽은 사람도 살린다 하였으니 시험을 해 보아야겠다.’ 하고, 칼로 자기의 중지 윗마디를 찍어 어머니 입에 흘려 넣었다. 그래도 효험이 없자, 다시 칼로 가운데 마디를 찍고 살을 짓이겨 쏟아지는 피를 어머니 입에 흘려 넣었다. 아픔을 참으며 밤새도록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이틑날 아침 죽었던 어머니 가슴에 온기가 돌면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안응준은 따뜻한 물수건으로 몸을 닦고 팔 다리를 주무르며 정성을 다해 간호를 했는데, 저녁때 쯤 어머니가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과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살렸다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안응준 효자 이야기는 인근 마을 까지 퍼져 모르는 이가 없었다.

5년 뒤 고을의 수령에게 알려졌고, 관찰사를 통해 조정에 까지 보고되었다. 그러나 정려가 내려지기 전에 임진란이 일어나 정려를 받지 못했다.

이산해 대감이 평해로 유배를 와서 황보리 곽씨집에 우거하면서 안 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산해 대감이 머물던 곽씨집은 안효자 집과 마주 보는 집이었다, 이산해 대감은 눈물을 흘리면서, 참으로 효자로다. 일곱 살 난 아이가 이런 일을 하다니...

스스로 자기 살과 뼈를 칼로 도려내어 어머니를 살렸다니, 이런 일은 근세에도 듣기 힘든 일이며, 옛날 서책을 보더라도 보기 힘든 일이다.

아! 손가락의 피가 어찌 죽은 어머니를 살릴 수 있겠는가. 이는 필시 아이의 정성이 금석(金石)을 뚫고 귀신을 움직였을 것이다. 아아, 사람이라면 누군들 부모가 없겠으며, 누군들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왕왕 선량한 천성을 잃고 사욕에 뒤 덮혀 죽은 부모를 살려내기는 커녕 도리어 살아계신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그들이 안응준 효자를 본다면 아마 부끄러움을 알게 될 것이다. “ 내가 시를 지어 주고 전(傳)을 지어 세상의 자식된 이들을 경계하노라.” 라는 기록과 함께 “일곱 살의 어린 아이로서 오히려 이와 같은 효행을 하였으니, 전고(前古)에 드문 일이기에 감동하여 절구 두수를 짓는다.”라고 기록하였다.

親人誰極又誰因/ 一夜回生서 息新/ 指曲등 能醫死病/ 兒誠知是動蒼호
‘어머니가 죽어감에 누굴찾아 하소연 할꼬/ 하룻밤 사이 희생하여 숨소리가 새로웠네/ 손가락 피가 어찌 능히 죽을 병을 고치랴/ 아이의 효성이 푸른 하늘을 감동시켰지/
離 褓識天倫/ 裏深誠但愛親/ 孝是生知寧待/ 世間無限讀書人學
겨우 강보를 떠난 나이에 천륜을 알았으니/ 뱃속의 깊은 효성 어버이 사랑 뿐이로세/ 효도는 나면서 아는 법 어찌 배우랴만/ 세상에는 독서하는 사람 한없이 많구나.


○ 울진군지 효행 편에는 효자 안응준(安應俊)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순흥인(順興人)으로 자는 성문(聖文)이며 참봉(參奉) 구(?)의 아들이다. 나이 7세 때에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여 자기의 무명지를 끊어 그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었으나 효험이 없었다. 다시 손가락을 끊어 피를 입에 넣고 곁에 앉아 기다렸더니, 다음날 아침에 어머니가 살아났다. 그 후 성인이 되어 5리나 되는 고개터에 분호(分戶)하여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어머니 안부를 척산동(尺山洞)까지 와서 살폈는데, 때로는 시간이 늦어지면 호랑이가 여러 번 데려다 준 기이한 일도 있었다 한다.
 

여각(閭閣) 안에 “열여 안망문(安望文)의 처 남씨지여(南氏之閭)”란 비석이 있다. 1700년경(숙종 때) 명정여(命旌閭) 되었다.(울진군지 효행편) - 출처: 《아계유고》 《울진 고문헌자료집성》 《울진군지》 《울진인의 의리정신 그 충과 효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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