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송알송알 싸리 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대롱대롱 풀잎마다 총총/ 방긋 웃는 꽃잎마다 송송송/ 동요 ‘구슬비’는 참 재미있다. 나는 아이들과 산길을 걸을 때 이 노래를 부르게 하고는 질문을 하나 던진다.

“거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답은 조롱조롱 거미줄에 매달린 옥구슬, 즉 ‘이슬’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옥구슬처럼 예뻐 보이지만 거미에게 이슬은 밥줄을 끊는 치명적인 훼방꾼이다.

한자 이슬 로(露) 자도 참 재미있는 글자다. 비(雨)와 길(路)이 합쳐진 모양인데 글자대로 우리는 주로 길에서 이슬을 만난다. 그런데 이슬(露)이란 글자는 원래의 의미보다 ‘드러나다’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노출(露出), 탄로(綻露), 폭로(暴露)에서 보듯 숨겨졌던 어떤 것이 밖으로 나타날 때 ‘露’자를 쓴다.

길가의 거미줄도 이슬(露)로 인해서 뚜렷이 드러난다. 때문에 거미에게 이슬은 치명적이다. 이미 노출이 되어버린 거미줄로는 먹이를 사냥할 수 없다. 먹이가 걸려도 진동수가 떨어져서 감지하기 어렵고, 이슬의 물기는 거미줄의 점착력을 앗아가서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이슬이 생기기 시작할 때 거미는 바쁘다. 밥줄인 거미줄을 잡고 줄타기 곡예를 한다. 미세한 물기는 빨아서 뱉어내고, 더 많은 물기는 모아서 방울로 만들어 내던지기도 하고, 또 그것을 굴려가며 큰 구슬로 키워서 거미줄의 탄력으로 물방울을 튕겨낸다. 그러다가 지쳐 밥줄을 포기할 때가 더 많지만 거미는 그렇게 밤을 샌다.

그 고생을 피하기 위해 거미는 날씨를 감지하는 능력을 키웠다. 다음날 이슬이 생길 기미가 보이면 거미줄을 치지 않는다고 한다. 더 나아가 ‘이슬거미’ 같은 경우는 거미줄을 생성하는 능력을 버리고, 몸체의 일부를 이슬 모양으로 진화시켜 노출을 역이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이슬과 거미의 관계는 파고들수록 신비롭다.

한편, 숨겨진 것을 나타나게 하는 이슬에는 이런 사연도 있다. 조선 중기의 명신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의 묘비 이야기다. 흔히 사람들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복 문서를 쓴 사람을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당시 27세에 불과했던 이경석이 문서를 썼고 후금의 일부 수정을 거쳐 최종 결정되었다.

치욕의 삼전도비에 새겨진 비문이 그것이다. 이경석은 그 일로 글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나라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충신이다. 효종이 북벌을 내세워 무기를 대량 제조하고 북쪽의 산성들을 대대적으로 증축한 적이 있었다.

청나라에서 기미를 알아채고 조선에 압박을 가해왔다. 이경석은 효종을 대신해서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가 황제를 속인 죄로 백마산성에 1년간 구금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을 송환시키는 역할을 맡아 큰 몫을 해냈다.

그러한 공덕을 인정받아 기로소에 들었고, 나이 74세에 현종으로부터 특별한 존경과 신임의 표시인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궤장연을 열어 축하하는 자리에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이경석이 남한산성의 항복 문서를 썼다는 이유로, 오랑케인 금나라에 끌려가 아첨을 하고 부귀를 누렸던 북송 인물 손적(孫覿)에 비유하는 글을 지었다.

이경석은 침묵했으나 훗날 박세당(朴世堂)은 이경석의 신도비문을 찬(撰)하면서 송시열을 맹비난 했다. 이경석을 봉황, 송시열을 올빼미에 비유하며 풍자했다. “봉황과 올빼미는 그 천성이 달라 어쩔 수 없듯 본성이 나쁘면 할 수 없다.(중략)

올빼미의 不詳함이 이와 같아 영원한 비석에 새기는 바이다.” 송시열의 노론이 그 비석을 가만둘 리가 없었다. 망치로 쪼아 비난의 글자들을 파내는 바람에 군데군데 홈이 파였다. 평소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다가 비석이 이슬에 젖으면, 그 구멍들은 마치 비석이 흘리는 눈물 자국처럼 선명했다.

이슬이 진실을 드러내어 돌이 눈물로 호소한다고 수군거렸다. 송시열의 제자들은 비석의 글자 전체를 갈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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