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변 제일교회 목사 김현국

 

여기, 두 남자가 병실에 누워 있다.
가난하지만 평생 가정에 헌신적이었던 A, 자수성가한 성격 괴팍한 백만장자 B. 병실에 나란히 눕기까지 두 사람이 살아온 삶의 길은 다르지만 앞으로 걸어갈 삶의 길은 비슷한 모양새다.

바로 죽음을 눈앞에 둔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한 A와 성공을 위해 가족을 포기한 B는 죽음 앞에서 의기투합한다. 생전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은 A의 목록을 보고 B가 ‘죽기 전에 그 리스트대로 해보자’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둘은 병실을 벗어나 스카이다이빙이나 해외여행 등을 하며 조금은 색다르게 죽음을 준비한다.


요즘 스페인의 고즈넉한 마을에 하숙집을 차린 한 예능 프로그램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산티아고 순례도 덩달아 이슈가 되고 있다. 필자도 수년 전 산티아고 순례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한국 문학역사에 획을 그은 작가의 아내로, 그 자신도 인정받는 소설가로 살아가던 저자가 인생의 황혼기에 훌쩍 떠난 순례의 기록은, ‘나도 그 길을 걸어가 보고 싶다’는 강력한 소원을 품게 만들었다.

하지만 부지런히 걸어도 40일이 걸린다는 이야기에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나는 아직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 내겐 그 길을 걸어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번씩 TV를 보면 괜히 울적해 지기도 한다.

우리는 새로움을 꿈꾼다. 그리고 새로움은 우리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새로움을 기대하며 우리는 일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고된 일상도 조금은 숨통이 트일 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자기만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꼭 해보고 싶은 일, 꼭 가보고 싶은 곳, 꼭 만나고 싶은 사람. 그래서 미처 지우지 못한 목록을 가지고 살면 그만큼 후회도 쌓인다.

그 후회는 어릴 적 부모님에게 보여드리기 싫었던 성적표처럼 우리 인생에 점수를 매기기도 한다. 마치 내 인생이 이렇게 쳇바퀴 돌 듯 제자리를 맴도는 건 저 목록들을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후회를 한다. 하지만 과연 그 이유 때문일까. 40일의 순례길을 걸어보지 않았다고 해서 40년 넘게 살아온 내 인생은 별 새로울 것이 없는 인생일까.

우리는 해보지 않은 것에 미련을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더 많은 가치를 얹고 후회한다. 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움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개봉의 선물상자가 아니다. 내 삶과는 무관한 자리가 아닌, 내 삶에서 발견하는 새로움이다. 그 새로움을 발견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지니는 가치를 발견한다.

봄이 되면 말라있던 나무에 새 순이 돋고 땅에서도 온갖 색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늘 살아가는 자리이지만 봄이 되면 우리가 새로움을 꿈꾸는 것 또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를 어느덧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죽변에 온지 2년째, 도시에 살면서 알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내 삶과는 무관한 것의 새로움이 아니었다. 봄이면 쑥과 냉이가 들어간 된장찌개를 먹었다. 달라진 건, 아내가 집 주변에서 직접 캐왔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돈을 주고 샀던 것들을 손수 따서 만든 조촐한 밥상은 봄으로 가득하다. 늘 지천에 널려 있었지만 발견하지 못한 사실들을 알게 되는 순간 일상에는 새로움의 싹이 튼다.

그래서 어쩌면 ‘해 보고 싶은 일’들에 대한 목록을 아예 만들지 않은 것도 좋을 것이다. 내 삶과 동떨어진 곳에서 삶의 새로움을 찾는 것 보다는, 날마다 내 삶에서 새로운 감동을 경험하는 것이 훨씬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조금 더 다르게 내 주변을 바라보기. 내 주변을 사랑하기. 영화 속 B는 왕래가 끊어져 버린 딸의 집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가족들과 재회하면서 진정한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살아갈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더 지혜로워질 수 있을까? 우리의 지혜는 세상에 대한 더 많은 지식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오늘에서 발견하는 일상의 소중한 새로움이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봄꽃이다. 우리의 봄은, 우리의 오늘은 그래서 날마다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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