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온정면 금천리 두곡동 출신)

 

요즘 고향에는 노인들만 남게 되면서 산길에 숲이 우거져 산소에 벌초를 하려면 길을 찾기조차 힘들어졌다. 가끔 멧돼지라도 출몰하면 놀라 식겁을 하게 되고, 묘소가 먼 곳에 흩어져 있어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후손들이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어 묘소관리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형님이 유명한 지관을 모셔와 묘소를 두루 둘러보게 하였다. 고조부(모) 산소가 가장 명당이라고 했다. 나도 그 지관을 만나 보니 믿음이 갔다. 그래서 친척들에게 두루 연락해 조상들의 산소를 이곳으로 모두 이장하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후손들이 고향에 살지 않다보니, 우리도 모르게 농어촌공사에서 용수로 공사를 하면서 제방을 쌓기 위해 묘지 뒤쪽 밭의 흙을 몽땅 파내간 것이었다. 그로 인해 비가 오면 밭에 배수가 원활하지 못해 산소로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밭주인이 흙을 퍼내 팔았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참 난감한 노릇이었다.

묘지에 인접한 그 토지를 매입하고자 언변이 뛰어난 8촌 형님께 부탁해 부산에 살고 있는 땅주인을 찾아가 매매를 위한 교섭을 하게 하였다. 형님이 3번이나 찾아갔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나중에는 땅주인의 고모인 분도 나서서 도리로써 설득해보았으나 이마저도 효과가 없었다.

그 땅을 매입하지 못해 고심을 하던 중, 경주 남산으로 여행을 갔다가 칠불암이란 자그마한 암자에서 불현듯 佛心이 생겨 아내와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108배 치성(致誠)을 드렸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기적처럼 땅 문제가 해결되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땅주인이 그 밭을 팔겠다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700평을 2,000만원에 매입해 형님과 조카 이름으로 등기까지 마쳤다.
 

나는 이곳에 수목장지를 조성하고자 규정을 알아보니 가족묘지는 최대 9평, 문중묘지는 300평, 수목장지는 600평까지 법적으로 허용된다고 한다.

수목장지는 자연을 친환경적으로 보존하고 벌초의 부담도 없어 최선의 선택이라 판단했다.

고향의 군청 노인복지과를 찾아가 수목장지 기준에 대해 문의하니 동네에서 직선으로 500m 떨어져야 하고 진입도로 완비가 필수라며, 컴퓨터로 주소를 검색해보더니 동네에 인접하여 불가능하다고 했다. 낙심했지만 규정집 가운데 중요한 40여 쪽을 복사해 서울로 가져와 가능한 방법이 무엇인지 검토해보았다.

자료를 살펴보다 ‘동네란 30가구 이상’이라는 대목이 나왔다. 다음날 울진군청으로 가서 담당자에게 이 대목을 보여주었다. 10여 가구인 마을이니 가능하지 않겠냐고 하면서 수목장지는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바람직한 장례방식임을 호소했다. 분묘는 농지와 임야가 그만큼 잠식되고 이웃에게 거부감도 줄 수 있지만, 수목장지는 그 자체로 공원이니 장려해야 마땅하다고 역설했다. 그럼에도 자연장지 조성은 8가지 규제에 저촉되지 않아야 할 만큼 까다롭다. 군청을 세 번, 수자원공사를 두 번 방문한 끝에 마침내 신고를 마칠 수 있었다.

수목장지를 조성하면서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토목공사를 2년 동안 네 차례나 했다. 그런데, 묘지 뒤쪽에 훼손된 지형을 복구할 때마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매번 엄청나게 내렸다. 그 덕에 배수에 문제점과 중요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평평한 곳은 배수가 원활하지 않으므로 땅을 깊이 파고 자갈로 채운 배수로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고 잔디를 심었다. 이때, 까치 한마리가 날아와서 파낸 흙더미에 앉아 공사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는 것이었다. 인부들은 기이하다고 한마디씩 했다. 나는 이 까치가 어쩌면 어머님의 혼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수목장지 왼쪽에는 금강송 77그루와 꽃나무 20그루를 심었고, 오른쪽에는 찾아오는 후손들이 따먹을 수 있게 과일나무 23그루를 엄선하여 심었고 거름도 듬뿍 주었다. 이 곳 선영에 모두 11분의 조상님을 모셨다. 묘비에는 가능한 한 한글로 고인께서 생전에 어떤 삶을 사셨는지 기록하였다.

산소에 토목과 조경공사를 하면서 82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든 솔선수범하시는 문중회장님의 훌륭한 人品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문중 冑孫(주손)인 아재께서는 바쁜 가운데서도 서울에 가서 태극기 집회에 참가했고, 후원금도 매달 보내시고 계셨다. 우리 집안에 이런 어른들이 계신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토지 구입과 산소 공사비와 문중의 위토(位土) 마련을 위한 지출을 이해 해 주었고, 공사를 할 때마다 인부들의 식사와 간식을 챙겨주기 위해 수고해 준 아내의 내조도 잊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모두 합심하여 도와준 덕분에 선영 공사가 만족스럽게 잘 되었다. 이제 내 마음도 아주 흡족하고 홀가분하다.

조상 추모에 대한 방법을 형님과 의논했다. 올해부터 기일제사는 후손들이 각자 집에서 추모하고, 추석날에 선영에 모여서 함께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이때 나는 고향 오는 친척들에게 숙소와 식사는 물론, 효도장학금과 선물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명당에 묘를 써야 후손에게 발복하는 것이라기보다, 살아계신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 자식들에게 효의 본보기가 되어 복을 짓는 것이 될 것이다.

죽으면 시신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때 친환경적인 것이 가장 좋은 장례방법일 것이다. 수목장을 하면, 분묘로 인해 농지와 임야가 잠식되지 않고 묘지가 공원처럼 되어 이웃에게 거부감을 줄여주고, 후손에게 벌초하는 부담도 줄여줄 수 있으므로 수목장이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이영희 (온정면 금천리 두곡동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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