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문 (시인/울진향토사연구회원)

 

비 온 뒤 미세먼지도 걷혀 오랜만에 맑고 깨끗한 하늘이다.
완연한 봄 길에 들어선 산천엔 연초록 물결이 넘실대고 있다.

오늘은 백암 온정일대의 구실령(주령) 옛길을 울진향토사회원들과 답사했다. 구실령 골짜기에 들어섰다. 봄 햇살의 부드러움, 싱그러운 초록 풀 내음, 옥구슬 구르는 듯한 맑은 물소리, 저 멀리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 계곡들!

때마침 계곡 하늘을 떠돌며 피어난 구름 꽃들은 우리가 별천지에 아득히 들어온 느낌을 준다. 참 맑고 아름다운 자연이다. 오랜만에 온 마음이 맑아지고 개운하다. 신선이 된 기분? 그래서 옛사람들은 구실령 일대를 신선계곡이라 했나보다.

조선조와 한국 근.현대사 초기인 1960년대까지 울진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옛길은 세 갈래가 있었다. 흥부(현 부구),죽변,울진에서 시작되는 십이령, 매화에서 시작되는 갈면의 고초령, 구실령(주령)은 『평해온정』일대에서 내륙 영양수비를 거처 한양으로 향하던 길을 두고 말한다. 우리는 이 세 고갯길을 『한국판 차마고도』라고 한다.

왜냐하면 신작로라고 하는 근대적인 도로가 닦이기전 쪽지게에 미역, 소금, 고등어, 오징어 등 해산물을 짊어진 바지게꾼,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와 일반 백성들이 넘나들며, 동해연안과 내륙의 물산을 나르고, 인간대소사 등 문화전파의 전령사 구실을 한 교통로였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유명한 해산물인 『울진고포미역』『울진소금』 『안동간고등어』 『잔치문어』 등도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또 하나 구실령에는 도로역사상 특기할만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스팔트라 할 수 있는 『돌 포장길』이 아직도 온전히 남아있다. 그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중요하다. 돌포장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조선조 평해군에서 재직한 군수의 영세불망비 2기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영세불망비나, 효자각등 표상할만한 유적들은 주로 사람들이 빈번히 오가는 큰길이나 길목에 세우기 때문에 구실령이 평해, 온정 일대애서 영양 수비로 넘어가는 주요 교통로이었음을 말해준다.

인근에는 인장바위,옥녀당,부처바위골,주령대호와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한편 근세, 이 일대 계곡은 전기 의병이었던 신돌석 장군이 울진의 갈면, 불영사, 강원도 삼척 등 동해안을 무대로 활동할 때 넘나들던 역사의 현장이다. 따라서 구실령 일대는 우리 역사와 민속 등이 살아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우리 일행은 구실령 옛길 전 구간에 걸쳐 답사치 못하고, 승용차로 포장된 도로(국도88번)를 넘었다. 첩첩산중의 고개 마루에 서자 탁 트인 시야가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북서쪽의 금장산 지맥에서 흘러내린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저 멀리 동해의 수평선이 아물거리는 풍광! 어느 분의 말씀으로는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아주 맑은 날에는 울릉도가 가물거리게 보이다고 하나 어쨌든 한 폭의 멋진 한국화 생경이요, 절경이다.

하지만 저 아래 협곡을 무거운 봇짐을 이고, 지고, 아차하고 굴러 떨어지면 목숨까지 위태한 벼랑길에 발걸음을 옮겼을 당시의 사람들! 그 고생과 애환을 산천은 알고 있을게다. 교통이 발달한 오늘, 단숨에 고개를 승용차로 넘는 우리는 분명 호사를 누리고 있다 할 것이다. 이곳을 지나는 관광객들도 승용차를 세우고 절경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거나 망망대해에 눈을 떼지 못한다. 구실령 88번 국도는 사철 내내 색색별로 독특한 풍광을 자랑하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드라이브 코스로 이름난 곳이다.

구실령 마루에는 지역의 사회단체에서 자연석을 이용해 『九珠嶺』으로 표기하여 빗돌을 세워 놓았다. 九珠嶺! 과연 바른 표기일까? 함께 간 일행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 우리는 구주령의 구(九)자에만 모자로 가리고 주령으로 나오도록 기념사진을 찍었다. 일종의 퍼포먼스(행위예술)를 한 셈이다. 아마도 빗돌을 세운 단체에서 『9개의 구슬고개』, 또는 『아홉구비의 구슬고개』라는 뜻으로 해석했거나 아니면 울진사투리인 『구실령』이 구질령 또는 구절령으로 발음하다보니 『구주령』으로 된 것 같다.

이 옛 고개에는 『아홉구비』가 없다. 『九珠嶺』은 잘못된 땅이름 표기이다. 아홉 구(九)자를 빼고 珠嶺(주령)으로 표기해야 한다. 하지만 필자는 우리말인 『구실령』으로 이름하고 싶다. 『구슬을 품은 고갯길?』,또는 『구슬고개?』 참으로 예쁜 우리 땅이름 아닌가? 『구실』이라는 말은 표준어인 『구슬』의 울진 사투리이다. 구슬은 금(金)과 관련된 말이다. 이 말은『금이 묻혀 있다』 는 구실령 계곡의 금장산(金藏山)에서 유래하였다고 보겠다. 그렇다면 왜 『九珠嶺』이 아닌 『珠嶺』이 맞는 땅이름인가를 문헌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평해에 유배 온 이산해(1538-1609)가 쓴 아계유고 『서촌기』에 『골짜기는 세 갈래로 되는데(중략) 그 중 하나는 조금 남쪽인 선암사 뒤에서 끝나고, 또 하나는 珠嶺 아래에 다다른다.』 하였다. 대동지지(1864, 김정호)에 평해 『山水條』에도 『珠嶺 西 四十里 蔚珍界 溫泉 西二十五里 白岩山下所台谷』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도 관동읍지(1885년)의 평해군 지도, 울진군여지약론의 산경조(1909), 강원도지(1940), 울진군지(1983)등에서도 『珠嶺』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땅이름을 새기는 빗돌이나 표지판 같은 시설물을 설치할 때에는 문헌기록, 지역의 전설, 역사 등을 잘 살펴서 신중히 표기해야 할 것이다. 빗돌을 세우느라 노력한 관련 단체에 바란다. 평해온정의 서쪽 관문이라 할 수 있는 『九珠嶺』을 『珠嶺』으로 고칠 것과 한글로 『구실령』을 병기했으면 좋겠다.

당국에서도 주령 둘레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관광시설들을 갖추었으면 한다. 돌아오는 길에 천년고찰 광흥사에 들렀다. 주지스님께서 내준 따뜻하고 향기로운 차 한 잔은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원기회복제나 다름없었다. 지면으로 감사드린다.

자기 태어나 살고 있는 향토는 선조의 삶과 역사와 현재 우리의 정체성이 깃든 곳이다. 우리가 향토사를 알고자 노력은 향토에 선대가 남긴 유·무형의 유산은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문화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사라는 것도 이러한 향토사가 모여 지어진 큰집에 다름없다 할 것이다. 향토사 없는 한국사는 한줄기 바람에도 쓰러지고 무너지고 마는 모래성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울진향토사연구회』의 활동도 그 하나이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바란다. 울진의 옛길, 구실령(주령)! 이름만큼이나 아름답고 보배로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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