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 문화원장의 6월1일 「의병의 날」을 맞으며



뛰어난 지략`용맹함으로 5백 의병 지휘

울진 등 6개 지역 3년여 활동, 왜군 무찔러

 

6월1일은 「의병의 날」이다. 더구나 금년은 3.1 독립만세 사건 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더욱 의미가 크다 하겠다.

흔히 의병이라 하면 20세기 전후의 항일 의병만 연상하게 되지만, 임진왜란 초기에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의 수는 관군을 능가했으며, 관군이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구한말 울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의병 활동을 했었지만, 주로 외지인이 창의한 의병진에 합세한 형태로 활동 되었다. 그러나 울진 출신으로 의병대를 창의하여, 의병들을 모집하고 활동한 분들도 있다. 죽변면 전배근. 북면 남태영 등은 직접 의병을 창의 한 분으로 울진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의병의 날을 맞아 울진 출신으로 의병대를 창의하여 3년여 치열한 항일 투쟁을 하다가 순국한 남태영 의병장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상고하고자 한다.


○ 남태영(南泰永) 의병장의 가계

남태영 의병장은 서기 1872년 (癸酉) 3월28일 울진군 북면 상당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울진의 독립 운동사’에는 남혁년(南赫年), 또는 적영(赤永) 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남태영 의병장은 영양남씨 22세 손으로 신라 때의 영의공(英毅公) 諱 ‘민(敏)’을 시조로 하고 있다. 중시조는 고려 중대광 도첨의찬성사(重大匡都簽議讚成事)로 영양군(英陽君)에 습봉(襲封)된 諱 홍보(洪輔) 공이다. 남 의병장의 15대 祖인 諱 영번(永蕃)공, 14대 祖인 諱 수(須)공, 12대 祖인 諱 거(柜)공 모두 고위 관직에 등용되어 나라를 위해 충성한 충절의 가문 후손이다.

소년기의 남태영은 총명하고 강직한 성품이었으며 자라면서 점점 의협심이 강해지고 호걸형으로 변하여 누가 보더라도 걸출한 인물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 의병 창의와 활동
 

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맺은 을사늑약 사건은 대한 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경천동지(驚天動地) 할 일로 온 민족이 비분강개하는 사건이었다.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망해가자 전국적으로 민간인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족의 생계를 팽개치고 의병진에 가담하여 왜병들과 목숨을 건 전투를 하는 이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갔고, 전국단위로 체계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항일 전투를 해 갔다.

울진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강년 부대나 신돌석, 성익현 등의 의병진에 가담하여 왜병들과 싸웠다.
남태영은 주변의 지사들과 뜻을 모아 창의하게 된다. 이때 공은 혈기 방장한 32세의 나이였다.

남태영은 울진군 서면 부근의 가까운 지역부터 의병들을 모집했다. 의협심과 애국심 하나로 모여든 장정들은 남태영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비록 소수의 인원이지만 울진 지방민들이 자체적으로 의병 부대를 창의 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남태영 의병장은 신속히 전열을 정비하는 한편, 각 자의 임무와 경비 조달 방안을 마련하는 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전투계획을 세워 주로 태백산맥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어느날 남태영 의병부대는 서울 방향으로 진격하기 위해 행군하던 중, 봉화군 소천면 일대에서 왜군과 마주치게 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적을 완전히 섬멸했다. 이듬해인 1907년에 봉화에서 피로 맹세한 혈맹동지 권용하(權龍夏)가 이끄는 의병부대와 만나 남태영을 통합 대장으로 두 부대를 합치니, 500여명의 대부대가 되었다.

그들은 주로 태백 산맥과 관련된 울진, 영양, 청송, 봉화, 풍기. 영덕 등 6개 지역에서 3년여를 활동했다 남태영 의병장의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거듭 거듭 혁혁한 전과를 거둠으로써 왜병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남태영 의병장을 일본인들은 ‘괴수(賊魁) 남태영(賊魁)’ 으로 기록하였다.

 

○ 남태영 의병장의 순국

남태영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는 1907년 봉화군 두전(斗田)지구에서 대규모 왜병들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했다. 그러나 왜병의 수가 너무 많고 화력의 열세로 많은 희생자를 남기면서 왜적들에게 붙들(被逮)리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그의 나이 36세인 1908년의 일이다. 이후 남태영 의병장은 감옥에서 사망했으리라는 소문만 들릴 뿐이었다.
 

그의 사후 90년 동안 남 의병장에 대한 사실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정부는 1990년 8.15일 광복절을 맞아 대통령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에 영양남씨 울진 문중에서는 2006년 12월 울진군수와 울진문화원의 협조로 매화면 만세공원 맞은편에, ‘남태영 의병장 충의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근거 및 자료- 울진군지 下권/울진의 독립운동사.2011 울진군 /명치백년사 총서/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공: 殉國義士 南泰永 義兵將 崇慕會長 남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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