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칼럼 / 초가삼간의 행복 10

 

주자는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한 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했고, 불가(佛家)에서는 작은 악(惡)이라 하여 가벼이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모여서 항아리를 채우듯, 작은 악이 쌓여서 큰 죄악이 된다. 작은 선(善)이라 하여 가벼이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모여서 항아리를 채우듯, 조금씩 쌓은 선이 큰 선을 이룬다는 가르침이 있다.

초등학교 때 ‘티끌모아 태산’ 이라는 격언을 배웠지만 여전히 어리석게 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인생이란 본래 그런 게 아닌가! 하며, 위안을 삼는다. 성인들은 하나 같이 ‘작은 것을 소홀히 하면 큰 것에 도달 할 수 없다’ 는 평범한 진리를 설하고 계신다.

뭔가 대단한 듯 글을 시작하는 것은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여 까맣게 잊고 사는 초가삼간의 일부인 ‘마당’ 에 대해서 거창하게 이야기 해보고 싶어서이다. 한옥에 있어서 마당은 집의 경계를 이루는 울타리 안에 있지만, 동네라는 공동체와 개인의 접점에서 완충작용을 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일반적으로 마당과 정원을 구분 없이 사용하거나 아예 같다고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마당과 정원은 엄연히 다르다. 우선 공간적으로 보면 마당은 훤히 비어있고, 정원은 무엇으로 꾸며져 있다.

기능적 측면에서는 마당은 작업과 놀이의 공간인 반면 정원은 휴식과 감상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텅 빈 마당은 정원에 비해 복사열과 빛을 반사하여 건축의 냉난방과 조명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마당을 둘러치는 한옥의 담장은 방어적 기능보다는 경계를 구분 짓는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산과 들의 경치를 집안으로 들여와서 정원의 감상기능을 대신함으로 한국인 특유의 개방적 심미안을 길러 내었다. (개방적 심미안-예를 들면 집을 지을 때 구부러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고, 도자기에 유약을 빗자루로 대충 쓸어 발라 문양을 대신하며, 큰길가에 때마다 갈아세우는 장승과 벅수의 모습이 매번 다르듯이 꾸밈 차림 등에 있어서 어떤 정형과 원칙을 고수하기 보다는 그때의 형편에 따라 시시각각 변형을 부리지만, 용(用)이라고 하는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는 것)

마당을 잃어버렸다. 마당의 어원은 분부하지만 어간인 ‘맏’과 장소를 뜻하는 ‘앙’이라는 접미로 이루어진 ‘맏앙’에서 왔다는 주장에 무게를 둔다. ‘맏’은 형제 중에 첫 번째를 ‘맏이’라고 하는 의미와 같다. 그래서 마당은 외부인이 우리라는 공간으로 들어 올 때 ‘처음 얼굴을 마주치는’ ‘맞이하는’ 장소인 것이다. 반대로 집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마당으로 나가야 손님을 맞이하고 동네를 맞이하고, 일터인 논밭을 맞이하게 된다.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자. 누구나 할 것 없이 아기집이라는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나면 일정기간 방에서 자란다. 그러다가 돌 쯤 되면 마치 새끼 새가 허공에 몸을 던져 둥지를 떠나듯, 혼자 걸음으로 첫발을 내딛는 곳이 마당이다. 마당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맞이하는 첫 번째 장소인 것이다.

이때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분명 인생이라는 성스러운 첫발의 감격과 환희는 생명의 밑바닥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으리라!

그 성스러움의 첫 번째 의식이 돌(돐)이다. 돌은 마당에서 익숙해진 걸음걸음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평생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첫발을 내딛다는 의미를 가진다. 마루에 돌상이 차려지고 이웃들이 마당으로 모여들면 한바탕 잔치가 벌어진다. 이것은 소위 동네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고 뉘 집 자식인지 안면을 트는 일이다.

설령 잔치에 참석하지 못해 직접 대면은 없었더라도 돌리는 떡을 얻어먹었을 테고 소문도 들었으니, 처음 보는 아이가 동네에서 어려움을 처했을 때면 삶의 경험에서 얻은 눈썰미로 뉘 집 자식인지 알아보고 안전하게 보호하고 집까지 데려다 준다.
이처럼 마당은 나와 동네 간에 공식적으로 첫 대면이 이루어졌던 곳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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