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칼럼

 

매일같이 하던 관악산 둘레길 산책을 열흘째 못하고 있다.
지난해 겨울부터 눈 한 번 제대로 내린 적이 없는 중부지역에 봄 가뭄이 계속되는 바람에, 산책로 흙길이 메말라 먼지투성이로 변했기 때문이다.

도시 둘레길인 만큼 평소에도 사람의 발길이 잦아 흙먼지가 적지 않았으나 지금은 숫제 땅을 밟기가 무서울 정도로 풀썩거린다. 당장 비가 오더라도 웬만한 양으로는 가뭄 해소에는 턱도 없을 것 같다. 지금 교외(郊外)에는 모내기가 한창인데, 오늘날에야 댐이나 저수지 그리고 수리시설이 완벽한 덕분에 가물어도 농사 걱정은 없지만, 옛날 같았으면 이 가뭄을 어찌했을까.

조선의 성군(聖君) 세종대왕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 1422년(세종4년) 봄부터 가뭄이 심해서 온 나라가 걱정이 태산이었다. 세종은 한양 일대에 영험하다는 산천마다 찾아다니며 여러 차례 기우제를 올렸지만 효험이 없었다. 끝내는 파종(播種)을 마쳐야할 음력 5월이 되도록 비는 내릴 기미조차 없어 망연자실 하고 있었다.

한편, 그에 앞서 4년 전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여생을 누리던 태종은 이 때 병이 깊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처지였다. 그럼에도 가뭄에 안타까워하는 아들에게 유언(遺言)으로 약속한다. “내가 마땅히 하늘에 올라가서 상제(上帝)께 이를 고하여 즉시 단비를 내리게 하겠다.” 태종은 결국 5월 10일에 승하(昇遐) 하였는데, 잠시 뒤 경기 땅 일대는 단숨에 가뭄을 해결하는 큰 비가 내렸다. 그리고 그해 대풍년이 들었다.

문헌에 의하면 그날에 내린 단비는 그 해만이 아니었다. 이후로 해마다 5월 10일이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고, 사람들은 그것을 태종께서 하사한 단비라 하여 <태종 비>라 불렀다. 오윤겸(吳允謙)의 「태종우(太宗雨)」란 한시를 보면, 무려 200년이나 이어졌다고 한다. 또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잡기》에는 임진년 왜란이 일어나던 해, 이백 년 가까이 어김이 없던 태종우(太宗雨)가 이때 처음으로 비가 내리지 않아 식자들이 은근히 걱정하였다는 내용도 있으니 신비할 따름이다.

오윤겸의 한시(漢詩)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主乘龍二百年(성주승룡이백년) 성군께서 승하한 지 어언 이백 년/ 一言憑几信如天(일언빙궤신여천) 병석의 유명(遺命)이 하늘같이 미덥더니/ 至今五月初旬日(지금오월초순일) 지금에 이르도록 5월 10일이 되면/ 每沛甘霖潤旱田(매패감림윤한전) 매번 단비를 내려 가문 땅 적시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해마다 비슷한 시기에 비가 내렸다는 것은 맞는 듯하다. 또한 당시에는 그만큼 일기가 순조로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기후(氣候) 라는 말은 1년을 24등분 하여 24절기로 나누고, 각 절기(節氣)를 3개의 후(候)로 나누어 도합 72후로 구분한 것으로 절기의 ‘기’와 절후의 ‘후’를 합한 말이다. 1년을 72절후로 나눈다는 것은 날씨가 어느 정도 고르지 않았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분류다.

실제로 조선 후기 이른바 소빙기(little ice age, 小氷期) 로 접어들면서 기상이변으로 대규모의 기근이 연례행사로 발생하기 전까지 조선시대 기후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태종우라는 신묘한 단비 이름이 탄생했을 것이다.

아무튼, 오리지널이 있으면 아류도 있게 마련이라,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태조우(太祖雨), 효종우(孝宗雨)라는 말도 조선말기에 등장한다. 태조우는 태조의 기신(忌辰)일인 음력 5월 24일, 효종우는 효종의 기신일인 5월 4일에 내리는 비를 뜻한다. 모두가 음력 5월, 즉 망종(芒種) 절기와 맞물리는 시기다. 보리는 거두고 모를 내야할 때 간절히 바라던 단비다. 서울에도 그 비가 내렸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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