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농모 배동분의 세계여행기(10)


 

귀농했을 때, 최소한 일년에 한 번씩은 농사지어 손에 넣은 땀 묻은 돈으로 다른 나라를 경험하기로 아이들과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꾸역꾸역 지켰다. 페르시아의 어느 시인은 “내게 은전 두 닢이 생긴다면 한 닢으로는 빵을 사고, 다른 한 닢으로는 영혼을 위해 히아신스를 사리라”고 했듯이 나 또한 수입 두 닢 중 한 닢으로는 아이들의 영혼과 정서를 위해 책과 여행에 몰빵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몇 천평이나 되는 안해 본 농사를 유기농으로 지으랴, 아이들의 정서에 신경 쓰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그렇게 자란 딸이 유럽배낭여행을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콧구멍에 바람이 들었는지 이번에는 엄마와 유럽배낭여행을 가고 싶단다. 그 당시 대학생이던 딸은 자신의 여행경비는 알바로 충당했다. 이번의 유럽 배낭여행도 알바로 번 꼬깃꼬깃한 돈으로 다닌 딸이니 어련할까.

할슈타트는 오스트리아의 잘츠카머구트에 속한 호수마을이다. 독일에서 많은 날을 여행하고 잘츠부르크에서도 몇 날을 보낸 터라 조금은 에너지가 주식시세처럼 바닥을 쳤지만, 다음 행선지가 할슈타트라는 사실만으로도 떨어진 당을 올리기에 충분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잘츠부르크에서 할슈타트를 당일 코스로 다녀가지만, 딸은 할슈타트에 대한 엄마의 탱천하던 기세를 미리 알고 사흘을 그곳에서 지냈다. 잘츠부르크에서 할슈타트로 가는 날, 비가 온다. 여행기간이 길수록 캐리어의 짐은 늘어갔지만 짐을 싸는 데 이골이 났으므로 문제되지 않았다. 중앙역에서 버스를 타고, 바트이슐역에서 내려 다시 기차를 타고 할슈타트역까지 가야 한다.

출발에서 도착까지 약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한참을 달렸을까. 귀가 막혔다 뚫렸다를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해발이 높이지고 있고, 창밖으로 보니 머리 위로 케이블카도 지나다니는 것으로 보아, 내려야 할 곳이 멀지 않음을 감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할슈타트로 가는 길은 여기 저기 복병이 매복하고 있었다. 우선 문제가 생긴 곳은 잘츠부르크 중앙역에서 버스를 타고, 바트이슐역에 내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사단이 난 것은 그 때였다.

바트이슐역에서 다시 할슈타트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티켓을 사야 한다. 문제는 딸이 서두르다가 기차표가 나오는 곳에 카드를 집어 넣은 것이다. 여지껏 능숙하게 해오던 딸은 자기도 왜 거기에 카드를 넣었는지 모르겠다며 사색이 되었다.
“그렇게 여행을 다녀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라는 말을 반복하는 딸. 딸은 역무원에게 사정이야기를 했고, 돌아온 대답은 이 기계를 관리하는 회사 직원이 오려면 삼사일 걸린다는 거였다. 공교롭게도 주말이 끼어 있어서...

문제는 그 카드에 우리의 남은 여행경비가 거의 다 들어 있고, 더 큰 문제는 나머지 여행 일정의 모든 기차예약, 버스예약은 물론 숙박예약까지 했고, 남은 여행경비 등이 그 카드에 있었기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게 되어 있는 상황! 또 지금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다가 만약 할슈타트로 가는 기차를 놓친다면, 어디서 자야 하나 하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 딸이 거의 혼이 나간 상태로 역무원 아저씨와 긴 상의를 하는 동안 난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럴 때 개입하면 아이는 더 당황하고,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을 흐릴뿐더러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겨도 또 혼자 처리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발 옆에 물러 서있을 때, 딸이 내게로 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상의를 해왔다.

내가 딸에게 처음 건낸 첫 말은 “누구나 실수를 한단다. 이럴 때 침착하게 네가 보인 행동이 정말 대견했단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딸의 좁아졌던 미간이 활짝 펴졌다. 우선 한국에 전화해서 카드를 중지시키고, 아빠에게 전화해서 나머지 비상카드로 여행경비를 더 보내달라고 하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는 가진 돈으로 서둘러 할슈타트로 가는 표를 샀고, 기차는 딸이 일을 처리하는 동안 오지 않고 저만치서 기다렸다는 듯 바로 도착했다. 진땀나는 상황이었다. 할슈타트로 가는 기차 안에서 딸은 내 손을 잡으며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감동이라고 했다.

유럽과 한국의 시차로 인해 한밤중에 주무시다 전화를 받으신 아빠도 첫 마디가 “괜찮아, 괜찮아. 다른 일은 없고?” 였다고 했다. 남편은 우리가 보내달라는 돈보다 몇 배 더 많은 돈을 보내주었다. 아마도 그것은 청춘인 딸에게 보내는 응원이었으리라. “다 괜찮으니 힘내라”는....
긴장하여 차가워진 딸의 손을 녹여주며 말했다. ‘딸아, 왜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겠니? 어른도 실수를 하고, 넘어지고 깨진단다. 실수와 실패를 먹이로 나이를 먹는 거란다. 엄마도 엄마의 길을 가면서 지금도 넘어지고, 깨진단다.’ 딸은 빗방울처럼 맑은 웃음을 보였다.

우리는 할슈타트역에서 내렸지만 복병은 또 있었다. 할슈타트역에서 내리면 바로 배를 타고 할슈타트로 들어가서 보통 그곳에 숙소를 정하는 데, 딸은 엄마를 위해 한적하고 멋진 곳으로 숙소를 정하느라 다른 마을에 정했다고 했다. 우리는 배선착장으로 가지 않고 기차가 떠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얼마만 가면 나온다는 마을은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길은 많은 부분 얼어 있었고, 어쩌다 얼지 않은 곳은 물이 고여 살얼음상태라 캐리어가 말을 듣지 않았다.

딸에게 말해주었다. 느림의 여행을 하려고 배낭여행을 온 것이고, 이렇게 오랫동안 여행을 하는데 어떻게 실수가 없을 수 있느냐고 했다. 나중에 보면 이런 것이 더 행복한 추억으로 문신처럼 남을 것이라고 했다. 걸어도 걸어도 마을은 나오지 않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은 어두워져 오고 있었다. 이러다 산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그때서야 딸은 숙소를 바꾼 것을 잊고, 한 정거장 먼저 내렸음을 깨달았다. 실수를 잘 안하는 아이인데 바트이슐역에서의 실수로 혼이 나간 모양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보니 우리 딸이 왜 애써 이곳에 정했는지 감 잡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딸 말이, 엄마는 하루의 여행느낌을 새벽까지 글로 정리하기 때문에 멋진 숙소를 정하려고 애썼다고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할슈타트인 만큼 내일은 예상치 못한 행복이 매복해 있을 거라며, 우린 가슴벌렁임을 잃지 않았다. 김영하 작가는 신작 <여행의 이유> 에서 “인생과 여행은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에 신비롭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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