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뚜기 인생 “주재현” 변호사

 

울진군 북면 하당리 외진 산골에서 19세, 18세 부모님을 둔 산골에서 태어난 아이가 오늘에 주재현 변호사입니다.

생후 6개월이 지날 무렵 가난한 젊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얇은 옥양목 호천하나 뒤집어쓰고 추운 겨울날 친적집 이바지에 갔다가 독감에 걸려 무릎 관절에 결핵균이 침입해 그때부터 험난한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약 한번 병원 한 번 가지 못하고 한쪽 다리는 영구 장애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무릎에 고름이 차기 시작하면서 열이 나고 퉁퉁 부었고 솔방울 채집하러 단체로 산에 올랐다가 아픈 다리가 부러져 다음에 재입학하는 생후 첫 시련을 맞이했다.

이때부터 고름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고 다리는 구부러져 깨금발로 뛰어서 학교를 가거나 부모님이나 이웃 어른들이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주기도 했습니다. 썩어 나오는 고름냄새로 인해 친구들이나 사람들 곁에 가기가 꺼려졌고 증조할머니가 입으로 빨아서 붙여주는 김치를 상처에 대로 헝겊으로 감아서 다녔으며, 방과 후에는 냇가에 혼자 앉아 고름을 닦아 내며 울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고름은 멈추었고 상처는 아물었으나 왼쪽 다리는 안으로 붙어 버렸습니다. 젊은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한 송아지 한마리를 키워서 그 비용으로 아버지 등에 업혀 영주행 직행 버스를 이용하여 분천역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석포에서 아연광산에 다니시던 큰 외삼촌 댁에 하루 밤 보낸 후 열차를 갈아타고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굽은 다리를 펴는 수술을 했습니다. 굽혀지지 않은 왼쪽 다리이지만 걸을 수 있는 행복을 느끼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울진읍내로 중학교를 진학하면서 울진종합고등학교 졸업 때 까지 6년을 자취 생활을 하였고, 주말마다 30리 길을 걸어서 집에 갔다가 다음날 다시 걸어서 자취방으로 오곤 했습니다.

다행히 중학교 3학년 무렵 ‘고운 말이 맺은 인정 한마을이 가족 된다’ 라는 표어가 당선되어
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자전거를 사서 외발로 타고 다니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는 아픈 다리가 활처럼 휘어져 매일 같이 통증이 찾아오고 외관상 보기도 흉하여 함께 찾아온 사춘기와 더불어 힘든 나날을 보내었고, 30대 부터 폐결핵을 앓아서 늘 오늘 내일 하시는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과 고행하시는 어머니 등 견디기 힘든 나날의 연속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1980년 여수 애양재활병원에서 두 다리를 절단한 후 장애 있는 다리는 곧게 펴고 장애 없는 다리는 6센티미터를 줄이는 수술을 한 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늦은 나이지만 학원 한 번 가보지 아니하고 홀로 대입 준비를 하여 부산대학 법과 대학에 입학 후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결과 무사히 법대를 졸업했으며, 30대 초반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해 1차에서 떨어지기를 10여 차례, 1차에서 합격한 것은 3차례, 결국 46세라는 나이에 합격해 연수를 마친 후 꿈에도 그리던 법조인이 되어 서울에서 왕성하게 열심히 가난하고 열악한 약자 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법 시험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고향에서 송이 장사를 오래하였고, 아르바이트도 여러 가지로 힘든 고난을 이겨내며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어려운 성장 과정을 거친 산골 청년이었으나 15전 16기의 불굴의 도전 정신과 끈기 그리고 도움을 주셨던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희망이 있다는 믿음을 한시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산골아이에서 산골청년으로 성장하여 이제는 중견 변호사가 되었지만 늘 고향을 생각하는 따뜻한 이웃과 같은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하며,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고 함께 아픔과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오뚜기 인생 변호사 주재현이 되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향신문 윤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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