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삼간의 행복 (15)

 

지난 호에서 마당은 평평하지만 갓 시집온 며느리에게는 하루하루 힘겹게 넘나들어야 하는 문전에 펼쳐진 높은 고개인 데, 시집살이의 애환이 묻어나는 진도 아리랑 전렴에 나오는 ‘문전 새 고개(문경재재)’의 연원을 알아보았다.

한옥에서의 마당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대목대목을 구분 짓는 통과의례의 예식장이요, 작업공간이며, 놀이터로서 변화무쌍한 생활공간이다. 며느리는 결혼과 동시에 남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당당하게 마당이라는 공간에서 시댁의 일들을 배우고 익혀 점차 동네라는 사회구성원이 되어가야 한다.

그런데 ‘며느리’와 ‘시집살이’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며느리’ 라는 말을 살펴보자. ‘며느리’는 한자 ‘맺을 매(媒) + 계집녀(女) + 저 이(伊) = 매녀이= 매녀리 = 며느리’로 변화된 것으로 ‘아들과 맺어진 여자라는 뜻’이지만, 일상에서는 ‘천대’, ‘구박’, ‘곁붙이’ 등으로 사용되었다.

“살갗이 잘 타는 봄볕은 며느리에게 쬐이고, 시원한 가을볕은 딸에게 쬐인다.”는 속담이나 작은 가시들이 촘촘히 돋아있는 “며느리 밑씻개풀”, 시어머니의 구박과 생트집으로 억울하게 죽은 한 많은 며느리의 사연을 담고 있는 “며느리 밥풀꽃” 전설 등은 구박과 천대의 상징들이다.

그리고 짐승들의 덧붙여 난 쓸모없는 발톱이나, 별 소용이 없어 보이는 뒤쪽 발톱을 “며느리발톱”이라 하고, “아들이 첩을 얻는 것은 좋아하면서도, 제 남편이 첩을 얻어 시앗을 보게 되면 못 견디어 한다” 는 속담은 며느리는 귀하지도 중요하지 않는 대상이었음을 말한다. 물론 경사가 겹치면 “며느리 보자 손자 본다” 는 속담도 있지만, 며느리는 늘 찬밥신세였다.

전통사회의 엄격한 사회규범은 며느리는 아무리 천대와 구박을 받더라도 함부로 행동 할 수도 없고,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고달픈 삶을 요구했다. 그래서 ‘시집살이’라는 단어는 ‘시집이라는 곳에 살러 온 사람’ 이라는 뜻으로 ‘식모살이’ ‘머슴살이’ ‘더부살이’ 처럼 주인에게 종속되어 주인을 돕고 보좌하는 하찮은 사람 정도의 뜻을 담고 있다.

이처럼 며느리의 시집살이는 집안의 가풍과 살림을 익히는 교육이라고 보기 어려운 수치에 가까운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온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준 가족의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그래서 마당 곳곳에는 며느리들의 눈물이 배여 있다. 시어머니 구박에 눈에 띄지 않는 뒤꼍에서 몰래 눈물 흘리고, 사립문밖으로 서방님 기다리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시아버지 헛기침에 깜짝 놀라고, 한겨울 바가지 더운 물에 손 담가가며 빨래하고, 장독대 정화수에 자식 빌고,…,…

과연 이러한 시집살이의 문전고개는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위에서 열거한 시집살이의 문전고개는 적어도 여성들이 친정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 같다.

고려시대는 남녀를 불문하고 재산을 고루 물려받았고, 딸은 시집 갈 때도 그 재산을 가지고 갔으며, 평생 재산에 대한 권한을 행사했다는 것에서 현대적 의미보다 더 확고한 남녀평등의 사회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많은 송사가 남녀형제들 간 재산분할에 대한 것이었으며, 남자형제들은 누이가 시집을 멀리가면 재산이 함께 이동할 것을 우려하여 결혼 후에도 집에 머물도록 했다는 기록들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한다.

이 같은 전통은 조선에도 이어졌다. 율곡 이이의 형제들이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것을 기록한 ‘분재기(보물 제477호)’, 「이이 남매 화회문기(李珥 男妹 和會文記)」에 따르면, 《경국대전》에 따라 먼저 선조들의 기제와 수묘(守墓)를 위한 가옥·토지·노비를 배정한 다음, 아들과 (출가한) 딸들에게도 적법하게 재산을 분배했다.

그리고 서모에게도 재산을 분배하여 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사회는 남아선호의 장남 중심으로 편재되었고, 문전고개는 점점 높아져 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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