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인간은 누구나 상대를 부러워하는 본능이 있다.
자양강장제 ‘박카스’ 광고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첫 장면은 포장마차에서 동료와 술잔을 나누면서, 내일 당장 사표를 쓰겠노라고 큰 소리 치는 직장인이 나온다.

다음은 이력서와 수험 책이 널브러진 자취방에 쪼그리고 누워 취업이나 돼야 사표를 쓸 거 아니냐며, 그 직장인을 부러워하는 취업준비생이 있고. 누워서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취업준비생이 마냥 부러운 신병 군인이 있다, 그 신병을 보고 포장마차의 직장인은 저 때는 제대만하면 끝이었다며 부러워한다.
유머를 이용한 광고지만, 실제로도 사람들은 항상 누구를 부러워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인류는 거친 자연환경에 불리한 신체적 구조를 무리를 이루는 방법으로 극복했다. 따라서 무리에서의 소외는 번식의 기회가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또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번식하려는 수컷과 우수한 유전자를 배태하려는 암컷의 본능에 의해 서열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경쟁과 질시는 인간의 본능이다.

한편으로 인류의 진화는 신체적 변화보다 문명의 진화가 수백 배나 더 빠르게 속도를 냈다. 문명의 발전을 통해 인류 보편적 윤리는 끊임없이 평등을 지향하며 발전했다. 그러나 경쟁과 질시의 본능은 신체적 변화 수준에 머문 채 그대로다. 또 인류문명은 규약과 제도의 발전과 교육 그리고 종교를 통해 본능을 억제해왔지만, 본능을 자극하는 조건들은 언제나 그보다 앞질러 달렸다.

근대 이후에는 경제가 경쟁의 절대적인 조건우위를 차지하면서 물질만능을 불러왔다. 경제를 위해 물질을 개발하는 기술들은 이제 인간의 심리까지 장악하고 마음속을 헤집으며 본능을 자극한다. 스마트 폰이 신체의 일부처럼 붙어 있게 된 요즘 시대는 ‘부러움’의 본능을 자극해서 돈을 버는 사람, 즉 SNS를 만든 사람들이 현생인류가 가장 부러워하는 부자들이다.

얼마 전 인터넷 금융 플랫폼 '토스(toss)' 에서 자사 홍보용 퀴즈 광고를 내면서, 정답을 맞히지 못한 사람은 3일간 자신의 SNS 프로필사진을 ‘펭귄’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 회사는 이전부터 꾸준히 퀴즈를 이용해 홍보를 해왔지만, 그때 만큼 크게 파장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순식간에 그 회사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파란을 일으켰다. 3일간 SNS 프로필사진을 차압(?) 한다는 조건은 그 정도로 효과가 컸던 것이다. 현대인들이 남에게 비쳐지는 자신의 이미지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작은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남에게 보여줄 사진을 찍고 SNS를 통해 공개를 한다. SNS 공유(共有)를 타고 한 바퀴 돌면, 말 그대로 지구촌 사진이 다 들어있다. 그 지구촌 사진을 구경하는 대가는 ‘좋아요’ 버튼이다. 댓글에 “멋지네요, 부럽네요.”를 달아두면 나중에 대가를 돌려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일을 하는 중에도, 또는 영화를 보다가도, 심지어 잠을 자다가도 ‘좋아요’ 개수를 확인한다.

하지만 우리는 남들에게 자랑거리를 얻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경제적 지출도 만만찮았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지출된 돈이야말로 남에게서 ‘부러움을 산(buy)’ 값이다. 따져보면 사야할 마땅한 이유도 없었다. 자극받은 본능이 쓸 데 없는 지출을 한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리언 페스팅어(Leon Fetinger)의 인지 부조화와 사회비교 이론에 대입해 보면 오늘날 사람들은 SNS 속 ‘타인’의 삶과 현실의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든 SNS에 올려 진 타인의 삶 또한 남에게서 ‘부러움을 사(buy)’기 위해 절반은 부풀려지거나 위장된 모습일 뿐이다.

타인과 나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와 나’의 관계다. 부풀려진 남의 삶에 쏠려있는 시선을 거두어 내 자신의 내면을 좀 더 살펴보고 보듬어 보자. 내면이 충실한 사람은 버튼이 없어도 타인이 볼 때 ‘좋아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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