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곡교회 김의철 목사


 

미국의 보스턴시 옆에 「소머빌」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성탄을 기념하기 위해서 시 당국에서는 시청 앞 광장에 첫 번 성탄절의 모습을 재현시켜 놓았습니다. 작고 초라한 마구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그의 남편 요셉,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 동방박사들의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었습니다.

첫 번 성탄절의 모습은 작은 도시의 새로운 명물이 되어서 시 당국에서는 성탄절 날에 성대하고도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가지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밤에 어떤 장난꾼이 아기 예수를 훔쳐가 버렸습니다. 마리아, 요셉, 양 치던 목동들, 동방박사들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단지 성탄의 주인공인 아기 예수만이 없어진 것입니다. 당황한 시 당국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계속 그 사실을 알리면서 아기 예수를 제 자리에 갖다 놓아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드디어 그 장난꾼의 마음이 움직여졌는지 아기 예수는 성탄절 이전에 다시 자기 자리에 놓여 졌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모두에게 무언의 귀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성탄절 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지고, 멋진 선물이 있다 할지라도 정작 성탄의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님이 안 계신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탄'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탄의 장소는 거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도둑의 소굴로 전락하고, 장사치들의 시장으로 변해버린 예루살렘의 성전은 만원이었습니다. 여관방도 인파로 가득찼고, 가정집의 사랑채도 빈 곳이 없었습니다. 베들레헴지역은 더더욱 그러했던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3D 직종에 종사하는, 들판의 양떼를 돌보고 겨우 입에 풀칠하는 목자들이 성탄을 알아보고 마음으로 맞이할 뿐이었습니다. 유대 땅도 아닌 외지의 동방박사들 곧, 점성가들만이 관심을 갖고 경배하기 위해 찾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로 비추어보면 심령이 가난하여 외롭고 의에 주리는 자들과 빈곤을 이기려 모여든 외로운 외국인 노동자들이 희망을 품고 맞이했을 뿐입니다. 세상의 그늘진 곳, 굶주림에 허덕이고 질병에 시달리는 곳,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심한 곳, 말구유처럼 더럽고 자기와 관계가 없으면 무관심한 세상…. 그런 낮고 낮은 곳의 상징인 말구유에서 예수가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예수 나심에 대한 감사 찬송을 불러 예수의 탄생을 감사해야 할까! 하나님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되는 가장 높으신 분의 '만민구원'에 동참할 자를 찾으십니다.

이 땅에 탄생하신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단순히 조용하고 잠잠하기만 한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화평 대신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34). 검의 용도는 끊고 자르는 데 있습니다. 역사의 연속선을 검으로 끊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역사는 BC와 AD로 나뉘었습니다. 그는 또 막힌 담을 허물어뜨리셨고, 가려진 휘장을 찢으셨고, 아담 이후 흐르는 죄의 연속선을 검으로 완전히 끊으셨고, 저주도 완전히 끊으셨습니다.

마치 구약의 여호수아가 흐르는 요단강을 반으로 가르고 약속의 땅에 들어갔듯이, 신약의 여호수아인 예수(여호수아의 희랍어 표기)는 죄의 흐름을 끊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예수가 오신 곳에는 마땅히 충격이 있습니다(마 2:3). 뒤집힘이 있습니다. 끊김이 있습니다. 기존 질서의 수동적 유지가 그가 원하던 평화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익숙했던 구습의 단절이 마땅히 따라와야 할 것입니다. 이번 성탄에는 진정한 심령의 뒤집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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