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 칼럼 - 초가삼간의 행복 18

 

서양에서는 철학과 종교의 경계가 분명한 반면 동양에서는 그 차이가 모호하다. 적어도 서양철학에서는 “신(神)은 죽었다”라고 외친 니체에 의해서, 신(神)은 철학과 과학의 범주 안에서 종말을 고했다.

니체는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와 도덕 등에 대해 ①본래 그 차체로 권위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②인간들이 임의적으로 그것들에 대해 가치와 권위를 부여했다. ③세대를 거쳐 전승되면서 그것들이 본질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둔갑하여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따라서 신, 권위, 도덕 등은 인간들의 편의상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

현재까지도 다양한 신들의 나라라고 불리는 인도 역시, 3천여 년 전 절대 신(神)을 내세운 기존질서에 저항하여 사문 (고행과 명상 등으로 해탈을 구하는 사람들) 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석가모니에 의해 신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막을 내렸다.

당시 인도인들도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창조주인 ‘비슈와 카르만 신’ 이 목수가 집을 짓듯 세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재료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재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엄마가 자식을 낳듯, 세상을 낳았다는 ‘프라자파티 신’을 등장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엄마의 세계’ 와 ‘자식의 세계’ 가 따로 존재해야 한다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풍선처럼 스스로 부풀어 올랐고, 여러 가지로 변하고 싶은 다화(多化)의 욕구를 가진 ‘브라흐만 신’이었다. 여기에 대해 다화(多化) 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체들은 신이 변하여 이루어 졌으니, 세상 모두는 신과 동등한 능력을 지녀야 한다. 그 능력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에 결국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신, 운명, 숙명 등이 있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에 책임이 따르지 않게 된다. 신에 의해서 ‘인간의 길’이 정해진다면 범죄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전적으로 신이 책임을 져야하며, 정해진 운명과 숙명이 있다면 정해진 길대로 살아야만 하는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와 달리 조선이 받아들인 유학과 성리학의 사회에서는 천(天)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개념이 나오지 않았고, 인간에 의해서 천(天)이 구현된다는 논리로 일관되어 왔으며, 지금 현재도 진행 중이다.

유학은 세상에는 하늘이 있고, 인간세계에는 하늘을 대신하는 황제가 있으며, 그 아래 왕, 신하, 백성들이 있다. 가정 역시 조상, 부모, 자식이라는 수직적인 절대 관계 속에 유지되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하늘의 천명(天命)이 바뀌기 전에는 말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하늘의 기운인 천명이 바뀌면 황제, 왕, 신하 등은 바뀔 수 있지만 낳아준 부모는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륜(天倫)이 인륜(人倫)으로 나타나고 그것의 최고 실천인 효(孝)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사회에서는 전쟁터에서 한창 싸우고 있는 장수라 할지라도 부모상을 당하면 집으로 돌아와서 시묘살이를 해야만 했다. 나라에는 장수가 여럿이 있어 전쟁을 대신 할 수 있지만, 부모는 하나 밖에 없다는 천명(天命)이 우선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이 해결책을 제시했으나, 두고두고 엉뚱한 문제를 일으켰다. 효의 모법으로 대효(大孝)를 실천했다는 순(舜)임금은 아버지, 계모, 이복동생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으나, 끝내 자식의 도리를 다하여 아버지께 기쁨을 드렸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제자 도응이 맹자에게 물었다. 만약 순이 천자였을 때, 순의 아버지 고수가 살인을 했고, 사법을 담당하는 관리인 고요가 체포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맹자가 답하기를 고요는 책무를 다했기 때문에 순이 임금이라 할지라도 체포를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아들인 순은 천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몰래 아버지를 업고 도망쳐 바닷가에 살면서 죽을 때까지 즐거워하면서 천하를 잊었을 것이다. 『맹자』, 「진심 상」35.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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