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성준(울진문화원장, 울진신문 집필위원)

 

삼한 전기 패망한 ‘실직국’ 후예 피난처

병위 포전 등 마을명이 왕피 뒷받침

안일왕 성내 1960년대까지 1가구 살아


 


○ 안일왕 산성의 위치 및 역사적 내력

금강송면 소광리에 소재하는 안일왕산에는 안일왕 산성과 대왕송이 있다. 안일왕 산성은 삼척 실직국의 왕이었던 안일왕이 신라왕의 침략에 패하여 울진의 소광리까지 쫒겨와서 성을 쌓고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죽었다는 전설을 비롯하여 강릉 예국의 침략을 받아 쫒겨왔다는 설, 및 도적의 추격을 피해 왔다는 설도 있다.

안일왕 산성 주변의 자연부락 지명들이 왕이 피난했다고 하여 ‘왕피천 (王避川)’이라 하며 ‘장군터’, ‘거리고 (巨里庫)’, ‘병위兵衛’, ‘임광터‘, ’거야(巨野)‘, ’포전(飽田)‘ 등 모두 군사와 관련된 용어로 불려지고 있어 왕이 피난했다는 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안일왕이 살았다는 연대를 추정해 보면, 신라가 삼척의 실직국(悉直國)과 강릉의 예국(穢國)을 병합하기 직전인 삼한시대로 추정된다.

옛 성터에 관한 문헌들이 별로 없어 역사적 사실을 명쾌하게 밝히기엔 무리가 있지만, 소광리 하천변에서 발견된 ‘황장봉계 표석’ 에 ‘安一王山‘으로 표기 되어있음을 볼 때, 산성의 주인공은 ’안일왕‘이라 추정이 가능하다.
성터는 오랜 세월 풍우로 말미암아 폐허로 변했다.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내의 집터는 잡목으로 숲을 이루고 옛 성의 윤곽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가장 최근에 성내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통하여 성(城)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었다.

안일왕 산성에 마지막까지 살았던 사람은 1가구로 김씨였다. 김씨네 일가는 삼척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화전을 일구며 살았는데, 1900년대 초로 추정된다. 산성에서 3~40년 정도 살다가 6.25를 만나 정부의 독가촌 이주정책에 따라 성을 버리고 나온 것으로 파악된다. 그 후 3년 정도 성밖 마을로 나와 살다가 다시 성내로 들어가 집을 짓고 약 10여년을 살다가, 1960년 경 완전히 성밖 마을로 이사한 것으로 파악된다.


○ 고문헌을 통해 본 안일왕산성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등 고문헌들과 울진군지와 같은 지역 문헌에도 안일왕 산성은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安逸王山 在縣 西 四十里 鎭山」▲『大東地誌』 蔚珍 條 〔山水〕 편 「安逸王山 西北 四十里」▲『大東地誌』 蔚珍 條 〔城池〕 편 「 安逸王山城 周 七百五十三尺」 高麗 穆宗 十年 ▲『東國輿地志』 蔚珍縣 古城 「安逸王山城」條 ‘石周七百五十三尺今廢」 및 ▲ 舊 『蔚珍郡誌』 『國譯 蔚珍郡誌』 ▲『울진의 얼』등에 산성에 대한 기록들이 있으나 극히 짤막하게 소개되어있다.


○ 황장봉계표석에 나타난 안일왕 산

1994년 소광리 하천변에서 ‘황장봉계표석’ 이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다.『울진군 성지유적 지표조사보고서』와『울진군지』에는 ‘안일왕 산’ 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황장봉계표석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바위는 세로 245㎝, 세로 195㎝, 높이 86㎝이며, 오른편에 가로 세로 60여㎝ 되는 곳에 5행으로 19자가 음각되어 있고, 횡으로 4자가 음각되어 있다. 글자의 크기는 대체로 8㎝이며, 한 획의 굵기는 8mm 이고, 음각의 깊이는 약 3mm 정도이다.
각석 내용은「黃腸封界 地名生達峴安一王山大里堂城 四回 山直 命吉」
「황장봉계 지명생달현안일왕대리당성 사회 산직 명길」이다.

 


◈울진군 성지유적 지표조사 보고서의 안일왕 산성

○ 현 울진군지의 안일왕 산성 기록(요약)

안일왕산성은 서면 소광리 세덕산細德山 일대에 있다. 소광리 계곡에는 ‘장군터’ 라 불리우는 마을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하천가에 “황장봉계표석”이 있다.
안일왕산성의 둘레는 약 1.1㎞이다. 성벽은 편축법을 이용하여 축조한 토석혼축의 성벽과 협축법을 이용하여 축조한 석축성이 혼재하고 있으며, 2개의 망루지와 2개의 문지가 확인되었다. 성안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 위에 올라서면 동쪽으로는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인다. 성안은 평탄하고 아늑하여 입보항쟁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고, 성안에는 석축으로 쌓은 1개의 우물지가 남아 있는데, 내직경이 87cm이고 외직경이 130cm이다. 수심은 90cm로서 수량도 풍부하고 맑다.
성내에서 채집된 유물 중 극히 작은 편들이지만, 삼국시대에서 고려초에 걸친 회청색 경질의 토기편들이 발견되었고,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와편들이 발견되었다. 이 기와들은 임시 피난처인 안일왕산성을 위해 이 일대에서 급히 만들어진 중`하품 기와들로 추정된다.


○ 안일왕은 누구인가?

원삼국 시대 때 삼척의 실직국왕이 신라 임금에게 항복을 하면서 강릉의 예국, 울진의 우중국 등이 신라에 복속되었다. 실직문화지에 실린 기록을 인용하면 안일왕은 실직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이때 신라에 항복한 나라는 실직(悉直 삼척), 압독(押督지금의 경산), 음즙벌국(音汁伐國 지금의 안강) 등 세 나라였다.

신라 파사이사금 때 패망한 실직국 사람들은 3년 후에 다시 봉기하여 부흥 전쟁을 전개한다. 그러나 신라군에 다시 패망한다. 신라는 이에 실직국이 다시 모반할까 봐 실직국 사람들을 모두 남쪽으로 옮긴다. 왕피리 전설에는 실직국의 왕과 백성이 모두 삼척 남쪽 울진으로 내려와 피난한 곳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파사이사금 25년. 정월에 많은 별들이 비오듯 떨어졌으나 땅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7월에 실직국이 모반하므로 파사이사금은 군사를 내어 이를 토평하고, 그 무리들을 남쪽 변방으로 옮겼다.」

신라가 실직국을 멸망시킨 다음 실직인들은 남쪽으로 옮긴 훨씬 후에야 실직국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실직주의 군주로 임명되어 파견됨으로써 비로소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지증왕 6년인 서기 505년 이사부가 실직주로 부임하기 이전까지는 실직국의 세력이 아직도 잔존하여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실직국과 신라는 그만큼 적대 관계에 있었고, 파사왕이 실직국을 정복하고서도 4백여년 동안 실직국의 명맥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직국 왕이 피신하였으므로 이곳을 왕피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왕피리의 전설은 실직국과 예국과의 관계를 설명해 준다. 실제로 실직국을 멸망시킨 나라는 신라인데도 왕피리의 전설은 예국이 멸망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와 예국이 뒤바뀌어 있다. 실직국의 안일왕(애밀왕)은 실직국에 전해 내려오는 유일한 왕의 이름이며, 또 유일한 실직인 이름이기도 하다. (1992 실직문화)


◈산성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

○김옥란 할머니의 이야기 (1941년생. 장군터 거주)

 

김옥란 할머니는 1941년 생으로 금년 78세이시다. 김옥란씨의 부친은 ‘김준수‘씨이며, 안일왕 산성으로 처음 이사를 온 것은 김옥란 할머니의 조부이시다. 조부님의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김옥란 할머니는 안일왕 산성에서 태어나 18살까지 살았다. 지금은 산성 아래의 ‘장군터’ 마을에서 사신다.

산성터 내에는 집이 한 채 밖에 없었는 데, 김옥란 할머니는 안일왕 산성 안의 한 채밖에 없는 집에서 태어났다. 김옥란 할머니의 본관은 삼척김씨이며, 조부님이 삼척에 사시다가 울진으로 이사를 와서 산성으로 들어갔는데, 왜 산성으로 들어가셨는지는 모르겠단다.

김옥란 할머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삼척에서 울진으로 이사를 와서 처음에는 대흥리 백골이라는 마을에서 살았지요. 우리 할아버지는 무슨 교(敎)를 믿었는데, 집에서 농사지은 곡식들이랑 돈이랑 자꾸만 가지고 나갔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못 마땅해서 일본으로 도망쳐 버렸어요. 그때 우리 아버지는 20세 정도였는데 엄마와 결혼한 사이였고, 아직 아기는 없었지요.
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와 보니, 그때는 할아버지는 가정이 너무 빈한하여 산성으로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있었대요“

김옥란 씨의 할아버지는 삼척김씨로 삼척에 사시다가 무슨 일 인지는 모르지만, 가족을 데리고 울진으로 와서 대흥리 백골에 정착을 했는데,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지 가족들을 데리고 산성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산성에는 이미 그 전에 살던 사람들의 터가 있었고, 주변 산들이 완경사지가 많아 화전으로 밭을 일구었다고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목수 일을 했기 때문에 집을 직접 지어서 살았다고 한다.
 

김옥란 씨의 부친인 큰 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큰 아들은 일본으로 가버리고 할머니와 며느리와 작은 아들을 데리고 농사를 짓고 살았다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우리 엄마, 그리고 둘째 삼촌을 데리고 산성으로 들어갔고요. 나중에 아버지가 일본갔다 돌아와서 우리들이 태어났는 데, 우리 형제 6남매가 모두 산성에서 태어 났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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