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며칠 전 극장에서 영화 ‘천문(天問)’을 관람했다. 한석규와 최민식이라는 걸출한 배우들의 명성에 기대를 하고 선택을 했으나, 요즘 사극영화의 일반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수준이었다.

영화 앞뒤로 역사적 기록을 자막으로 보여줌으로써 마치 영화 내용이 개연성이 높은 것처럼 꾸몄으나 각본상 트릭일 뿐, 사실과는 거리가 먼 영화적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천문’ 類의 영화를 볼 때, 내용에 집중되기 보다는 역사적 사실이 투영되어 머릿속에는 또 다른 편린들이 나열되는 현상을 경험한다.

영화 ‘천문(天問)’에서 세종대왕과 장영실은 군신간의 관계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우정을 나누는 데, 몇몇 장면은 거의 브로맨스(bromance) 수준이다. 장영실이 내전의 문을 모두 먹물로 검게 칠하여 방안을 어둡게 하고,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조선의 밤하늘 별자리를 연출한다. 세종과 장영실이 나란히 누워 별을 감상하다가 북극성을 일컬어 대왕님의 별이라고 하자, 세종은 그 별 옆에 구멍을 내어 별 하나를 만들고 “이 별은 너의 별”이라며 선물한다. 원래 없던 별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객성(客星)이다.

동양에서는 객성(客星)이 나타나면 난리가 난다고 했다. 1572년 11월 2일 북극성 주변에 진짜 객성이 나타났다. 조선은 바로 전날 한양에 도착한 명나라 사신 한세능(韓世能)과 진삼모(陳三謨)를 접대하여 밤새도록 잔치를 벌이느라 밤하늘을 볼 틈도 없었던지, 그날에 나타난 객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여섯 살짜리 어린 황제, 만력제가 등극한지 겨우 3개월이 지나고 있었기에 조정은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러웠다. 그 와중에 하늘에서 이변이 나타난 것이다. 평소에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혜성과 달리 이 날에 나타난 객성은 2년이 넘도록 한 자리에서 번쩍거렸다. 명나라 기록에 “처음에는 작은 술잔만큼 컸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날 탄생한 초신성은 얼마간 목성보다 밝았다. 오늘날 그 별의 이름은 ‘SN 1572’이다. 별자리로는 카시오페이아자리 B이며, Ia형 초신성으로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튀코의 초신성’ 잔해라고도 한다.

6세 짜리 황제는 하늘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으나, 황제를 보위(保衛)하던 내각대학사 장거정(張居正)은 이 엄청난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어쨌거나 황제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리다. 하늘이 노해서 객성을 보냈으니 하늘을 달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천제(天祭)를 크게 올리고 황제를 더욱 옥죄어 몸가짐을 단속하여 학문에 매진케 했다. 황제는 검소한 옷을 입었으며 반찬 가지 수를 줄이고 잠자는 시간을 줄였다. 생모인 효정황후를 만나는 횟수까지 줄여가며 호되게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한 생활은 객성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동양에서 객성(客星)이란 그런 것이다.

딴 생각에 젖다보니 영화는 어느새 후반부로 치닫는다. 세종대왕이 탄 가마가 진창에 빠져서 삐걱대다 바퀴가 부서지면서, 가마는 수렁에 처박히고 대왕은 진흙탕에 나뒹군다.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고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에 무방비로 누운 임금께 신하들은 목청을 높인다. “죽여주십시오. 전하!”

장거정의 가마는 튼튼했다. 장정 32명이 매는 가마였다. 가마 안은 침실과 응접실 그리고 화장실이 분리되어 있었으며, 응접실에는 시동(侍童) 2명이 함께 타고 다니며 시중을 들었다. 어린 황제에게는 하늘에 용서를 빌게 하고 장거정은 그 가마를 타고 고향을 다녀왔다.

훗날 장거정이 죽고, 그의 위대한 명성 뒤에 가려진 사치에 만력제는 할 말을 잊는다. 황제 자신은 검소해야 했기 때문에 비빈(妃嬪)들에게 줄 선물을 살 돈이 없어, 10년간 장부에 기록을 해두고 돈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선물해야 했다. 영화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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