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 칼럼 - 초가삼간의 행복 19

 

정의, 자유, 평등, 예의 등은 머릿속 개념들일뿐 실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상대적 개념, 즉, ‘크다 작다’ 처럼 어떤 것에 기준을 두고 판단하는 것 모두가 맹자의 효와 같은 다음의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지난 호에 ‘비록 아버지가 살인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아들은 그 죄를 물을 수 없으며, 아들은 왕의 자리를 버리고서라도 아버지와 함께 평생을 숨어서 봉양해야 한다.’는 맹자의 효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죽임을 당한 사람의 아들은 어떻게 효를 실천해야 하는가?, 생업을 포기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를 찾아서 복수를 해야 하는가?, 직접관계가 없는 두 아들은 자식이라는 이유로 서로 죽여야 하는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지만 시대가 그것을 기준으로 선택하는 순간 정의가 되며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이처럼 문화라고 하는 인간사회의 수많은 규범과 개념들 역시 어떤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진다. 한국인들의 규범을 주도했던 유학이 쇠퇴하면서, “육례 관혼상제향상견(六禮冠昏喪祭鄕相見)《禮記-王制篇》”이라는 예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고집스럽게 지켜진다는 상례 역시 화장으로 바뀌고 있다.

장례식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뉘 집이라 할 것 없이 상조회사 직원의 안내에 따라 영문도 의미도 모른 채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작금의 현실은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저마다 일가를 이룬 예법’을 고수했던 선조들의 기준에서는 우리 모두가 사람도리를 저버린 금수(禽獸)가 되었다. 현재처럼 예의가 지나치게 경솔해지는 것 역시 우려되는 일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예의는 반드시 필요하며, 조선은 예학(禮學)이라고 하는 효제충신(孝弟忠信)을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기준이 너무나 옹색하고 지나쳐서 효종의 국상에서 자의대비(효종의 계모)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 문제로 야기된 ‘1차 예송논쟁’,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의 생모인 인선왕후가 승하하였을 때, 대왕대비인 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2차 예송논쟁’ 처럼 국가를 혼란에 빠트리는 등의 숱한 문제를 낳았다.

예의가 본래의 목적과 달리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타민족(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길 때까지 이와 같은 명분싸움에 몰두하였다. 분명 《예기-곡례편(曲禮篇)》에 “예종의 사종속(禮從宜 使從俗)”이라 하여 ‘예절은 항상 그 타당성을 좇아서 정하고, 외국이나 다른 지방에 가서는 그곳의 풍속을 따르라’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체 없는 명분에 함몰되었던 것이다.

타당성을 잃어버린 조선의 예학은 자식의 하늘인 부모(조상)는 장손이 모셔야 하고, 부모의 유산 역시 장손이 독점해야 한다는 묘한 논리를 내세웠다. 이것은 예의라기보다는 통치의 방법이자 정치논리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낸 것이다. 남존여비로 여성을 집안에 가두고, 조상제례를 내세워 장남 이외의 모든 아들들의 영향력을 제한시켰다. 이렇게 되면 부모유산을 물려받지 못한 차남이하 여러 아들들의 경제력과 사회적 힘은 거의 사라진다.

여기에 결혼하여 온갖 어려움과 굶주림을 참으며 모은 쥐꼬리만 한 유산 역시 자신의 장남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사회구조에서는 종갓집 장손 이외는 온 나라 백성이 가난을 면치 못한다. 그래서 말이 좋아 집안의 우애고 사람의 도리이지 집안 전체가 종갓집 노비로 전락해버린 희망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성을 다스리는 관료집단들의 입장에서 보면 백성들은 가난하고 힘없어 착취하기 쉽고, 장손들은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것은 물론 자칫 역모로 몰리면 멸문지화를 당하니, 대소집안을 미리 단속하여 사회적 불만을 차단시키고, 이 모든 것이 성현의 말씀이며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일로서 명분이 뚜렷하니 최고의 통치 방법이었다.
이 같은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감내해야 하는 애환은 오죽했으랴!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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