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 (울진문화원장, 집필위원)

 

 

 

한 달 전부터 예상치 못한 ‘코로나 19’ 라는 괴질로 전 세계가 공포분위기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괴질의 근원지인 중국 다음으로 많은 확진자가 발생되어 온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다. 세계보건기구인 WHO에서도 심각단계로 높힐 만큼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중국 사람들은 책상다리 네 개만 빼고, 네다리 달린 짐승은 모두 먹는다 할 만큼 먹거리가 다양해서 그들이 먹는 박쥐에서 전염되었다고 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검증 안된 음식물을 함부로 먹는 것도 문제겠지만, 더 주의깊게 보아야 할 점은 근원지가 중국이란 점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괴질들이 중국에서 전염된 경우가 많았다. 서기 1886년 丙戌年 여름에 조선에 호열자(虎列刺)가 퍼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요즘 말로는 ‘콜레라’ 인데 그때는 현대 의학이 없었기 때문에 전염되면 속수무책이었다.

치사율이 60~70%를 넘었다는 공포의 이 괴질에 일가족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온 마을 전체를 불살라 버리기도 하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엄청난 대재앙이었다. 기록에 보면 ‘감염되면 설사, 구토, 고열 등으로 신음하다 2시간 내지 36시간 내에 죽는 자가 많았다’고 했다.

그 때의 호열자도 근원지가 중국 청나라였다. 청나라에서 번진 괴질이 갑신정변(1884) 이후 청일 양국이 조선의 주도권을 잡기위해 쟁탈을 하는 과정에서, 청나라 군인들에 의해 조선으로 전염된 것이다.

8.15 해방되던 다음해인 1946년 丙戌年에도 우리나라는 콜레라가 만연되었는데, 특히 동해안 울진지역에서 많은 희생자가 있었다. 그때도 콜레라의 진원지가 중국이었다. 36년간 억압속에 살던 조선이 해방을 맞이하니, 중국 상해 쪽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이동과정에서 전염되었다.

어쨌건 역사적으로 보면, 괴질의 진원지는 늘 중국이었다. 우리나라의 관광정책상 인구가 많은 중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하겠지만, 무조건적인 수용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현대 의학이 없던 옛날에는 이런 괴질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물론 제중원과 같은 공립 의료기관을 통해 한약과 침, 뜸 등으로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지만, 우선 이러한 재앙은 군주의 부덕(不德)으로 돌려 임금님이 명산이나 대찰에 나가 천신에 제사를 올렸다. 지방 수령들도 마찬가지로 일정한 장소에서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렸다.
 


울진군에도 수령들이 제사를 올린 ‘여단(癘壇)’ 이란 장소가 있었다. 울진읍 온양리 온곤동(蘊崑)과 평해 성황단(城隍壇) 내 1개소가 그것이다.

지금도 울진읍 온양리 온곤동에는 ‘여단터’가 있어 주민들은 매년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낸다.
서낭터는 마을 서쪽 인근에 잡목과 시누대가 숲을 이루고, 숲속 중앙에 금기줄이 쳐진 큰 노송 세 그루가 있으며, 노송 주위로 너댓 평 남짓한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다.
‘여단(癘壇)’의 제사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제사를 올리며, 제관 선임에서부터 매우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준비한다.

필자가 10년전에 ‘여단’에 관한 칼럼을 쓰면서 조사한 바로는 당시 온곤동에는 11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6가구만 살고 있었고 그나마 남자가 사는 집은 4가구뿐이었다.

남자가 적으니 제관 선임에도 애로가 많다. 제관은 부정한 일이 없는 남자로 마을 좌상이 동네회의를 소집하고 유사와 상의하여 뽑는데, 사람이 적으니 일일이 그 자격을 다 갖추지는 못한다고 한다. 예전에는 밤 12시경 제사를 올릴 때 마을사람들의 왕래를 금했고, 개들도 다른 마을로 이동시켰는데, 이제는 이런 절차를 지킬 수가 없다고 한다. 제관이 없어 얼마 전 금년 보름날에는 단 한사람이 가서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울진군지“災異” 편에 보면 ‘여단’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옛날에는 매년 전염병이 유행하여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그리하여 고을마다 여단(癘壇)을 세우고, 수령이 여단에 나아가서 여역신(癘疫神) 에게 그 지방이 평정하도록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울진에는 울진읍 온양리 온곤동(溫昆洞)에 여단이 있었는데, 제삿날은 봄과 가을철 전기(前期) 3일에 제사발고식(祭祀發告式)을 거행하였으며, 제수로는 콩죽밥국으로 고을에서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전사(戰死), 도난(盜難), 구타(毆打), 물과 불의 화를 당함 [火水], 굶어 죽음[餓死], 전염병[疫疾], 눌려서 무너짐[頹壓], 벌레가 몰려와 무는 것, 남편이 형을 받는 것[刑〕 재물을 탐 내는 것[財物], 핍박 받아 죽음[逼死], 처첩(妻妾), 운명(殞命), 스스로 목 매는 것[自縊], 아이를 낳다가 죽음[産死], 벼락 맞아 죽음[震死], 떨어져 죽음[墜死] 등은 군내 구역 안에서 죽은 신[盖境死亡之神]이라 하였다.」

 

이렇듯 여단에서는 그 고을의 안녕을 위해 폭넓은 의미의 제사를 올린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런 대책없이 저절로 낫기만을 기다렸던 옛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이 연상되는 기록이다.
메르스나 코로나 같은 예전에 없던 신종 괴질의 발생을 보면서,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는 인간들의 죄악에 대한 보응(報應)은 아닌가 뒤돌아 보게 된다. (2020. 3)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