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 (출향인 집필위원, 시인)



죽변 매정마을 애국 선열 4인

 

죽변에는 매정(梅亭)이라는 마을이 있다. 조선초기에는 학문을 숭상한 마을로서 서당이 있었는데, 공자의 공을 따서 공군이라고도 불렀다.
매정에는 일제강점 때에 40여 호가 살았다. 당시 신안주씨 15호, 울진장씨 9호, 안동권씨 9호, 김씨 등 여타 성씨 7호가 있었다. 신안 주씨가 1870년경부터 매정마을에 집성촌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에 관심을 가지고 된 것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신안 주씨(新安朱氏)로서 매정이 나의 외가요, 진외가이기 때문이다. 또 나의 왕고모도 이 마을 신안 주씨와 혼인을 하였다.

또 하나 중요한 관심사는 이 조그만 마을에서 4명의 독립 열사가 나왔다는 점이다. 순국열사·애국지사로 추서된 분이 주진수(朱鎭洙)·주병웅(朱秉雄)·주진욱(朱鎭煜)·주병책(朱炳策) 4인이다. 이들 4명은 모두 신안 주씨(新安朱氏) 이우당(二友堂) 개신(介臣)의 후손이라는 점도 특이하다.

울진군에서 매정마을은 독립운동의 산실이라 할만하다. 역사의 뜰에 굵은 발자국들이다. 이들의 독립운동을 통해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울진 매정인의 독립투쟁은 우리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주진수의 계몽운동과 독립군기지건설, 고려혁명당 활동

1878년 울진 매정에서 태어 주진수 애국지사는 ‘구국 계몽운동’ 을 했다. 전통적인 학문이아니라, 서양 학문을 받아들여 사람을 기르고, 민족자본을 키워 침략국가의 손아귀에 드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1908년 3월 울진에 사립 만흥학교를 설립하였으니,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러나 이 학교는 1910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고 말았다.

이 시기 주 지사는 신민회에서 활동하였다. 여러 기록에서 1910년 신민회 간부로 활약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10년 들어와 신민회는 보다 적극적인 길을 모색하였다.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주 지사는 1910년 봄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열린 신민회 간부 비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군관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강원도 책임자로 임명되어 기금 10만원을 마련하도록 배정받았다. 주진수는 양기탁 이동녕과 함께 만주일대를 비밀리에 답사하여 후보지를 선정하고, 이주 준비를 진행했다.

이때 울진지역 유림들은 대거 만주로 망명하였다. 또한 경북 유림들의 만주 망명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 주진 지사다. 그는 1910년 음력 11월 황만영과 함께 안동의 이상룡을 찾아와 신민회의 기지건설계획을 알렸다. 이와 관련된 사실은 『석주유고』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한일 합방 이듬해인 1911년 9월 양기탁·류동열·윤치호·안태국·이동휘 등 신민회 회원 600여명이 사내총독암살사건(일명 105인 사건) 으로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주진수는 1912년 9월 27일 출옥하여 가족을 이끌고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고 있는 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의 추가가(鄒哥家)에 정착하였다. 여기서 그는 이시영(李始榮)·이상용(李相龍)·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 등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는 등 독립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 9월에는 신참(新站)·황지강(黃地江) 등지에서 미국차관 3백만 불의 도입문제로 순회강연을 했다.

주 지사는 1926년 고려혁명당 조직에 참여했다. 창당 당시 고려혁명당 간부진은 위원장 양기탁, 책임비서 이동구, 위원 정이형(鄭伊衡)·현정경·고할신·오동진·이동락(李東洛)·김봉국·현익철(玄益哲)·이규풍·최소수·주진수·곽종대 등 13명이었다. 고려혁명당의 당원 수는 정당원과 준당원을 합하여 1,500여 명에 이르렀다. 울진출신으로 고려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인물로는 전영경(田永璟)이 있다.

그러나 일경에 체포되는 대원이 속출하였다. 1926년 12월 이동락이 일제에 체포될 때, 고려혁명당 관계자 이름이 적힌 서류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는 이를 토대로 대대적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이듬해 12월까지 당 간부 20여 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당 내부에는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하는 인사들이 많아 내부 분열이 잦았다. 결국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탈당하였다. 그리고 정의부도 당과의 인연을 끊고, 주진수와 이규풍 등도 소련으로 돌아갔고, 고려혁명당도 해체되었다.

소련으로 돌아간 뒤, 주 지사의 활동은 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1991년 정부는 주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주병웅의 27결사대 을사오적 척결 의열투쟁

주병웅은 1883년 죽변면 후정2리 823번지 매정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봉천성(현 길림성) 유하현 오도구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27결사대에 가담했다. 그들은 1919년 1월 제3차 회의에서, 광무황제 국장일을 기하여 을사5적과 정미7적을 응징할 것에 합의하였다.

을사오적이란 1905년 을사늑약을 주장했거나 찬동한 대신으로,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학부대신 이완용을 말한다. 7적이란 1907년 광무황제가 헤이그특사 사건에 책임을 지고 퇴위할 것을 강요했던 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일곱 명의 대신을 가리킨다.

27결사대의 총 실행책임자는 이탁(李鐸)이었다. 이 결사대 27명 가운데, 울진인으로는 주병웅과 손창준(孫昌俊)이 있었다. 이들 결사대는 1919년 2월 24일 봉천을 출발하여 2월 26일 서울로 잠입하였다. 결사대의 매국노 처단거사는 광무황제의 국장일인 3월 3일을 기해서 일으키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3월 15일에야 권총 6정과 탄환 수백 발을 입수하여 거사는 실행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군자금 모집활동 행적이 드러나면서, 5월 5일 23명의 대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27결사대의 거사는 비록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1920년대 초반부터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원들이 국내로 진입하여 벌이는 의열투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 때 손창준은 징역 10년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주병웅은 1921년 3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장이 자신을 강도라 한 것에 대해, “내가 목표로 한 공적을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에 불충했다는 그 죄명으로 중죄를 준다면 8년이 아니라, 80년을 준다고 해도 원한이 없다.”라고 항변하였다.

주병웅은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4년 만인 1925년 옥중 순국하였으니, 그의 나이 42세였다. 정부는 1963년 주병웅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주진욱의 비밀결사 창유계 활동

1914년생인 주 지사는 비밀결사단체인 준향계(準香契)와 창유계(暢幽契)에서 활동하였다.

준향계는 당시 30세를 전후하는 나이로서, 한마을에 1∼2명씩 선별하여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또 창유계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이는 울진농민조합의 붕괴로 침체국면에 빠진 울진지역 사회운동을 진작시키기 위해 조직된 새로운 비밀결사였다.

그러나 1943년 3월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연결되어 밀파된 계원 남원수가 만주로 향하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창유계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졌다. 이에 창유계 관련자 102명이 검거되어 울진연무장에 수감됐다. 그 가운데 61명은 무혐의로 석방되고 41명이 입건 구속되었다. 일제의 고문으로 판결이 나기도 전에 여러 명이 순국했다.

남원수·남지학·이두영·전만수·전원강·최황순 6인은 모진 고문으로 순국했고, 남석순·윤대규·윤종수·장세전·장영준·전병찬 6인은 예심과정에서 옥사하였다. 남복이·노하순·주영석·주진욱 4인은 복역 중에 옥사했다. 임시헌·주한석·최효대·남정성·최연덕·남용식 6인은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으로 울진 사회 전체가 한동안 암흑의 늪에 빠져 아픈 진통을 겪었다. 주 지사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5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21일 옥중 순국하니, 그의 나이 32세였다. 1991년 정부는 주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주병책의 영덕군 독립만세운동

1900년생인 주병책은 매정에서 살다가 영덕면 금호동으로 이사하면서, 잡화상을 운영하며 기독교 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영덕면 남석동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만세운동은 금호동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강우근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강우근은 금호동 예수교 장로교회에 있던 기독교인 50여명을 모아 태극기를 품고, 영덕시장으로 향하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강우근을 비롯한 20여명의 군중이 체포되었다.

주병책도 이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태 90도를 받았다. 그의 나이 20세였다. 2009년 정부는 주 열사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울진군지󰡕 상·중·하권, 2001 ▸김희곤 외 󰡔울진의 독립운동사󰡕, 2001 ▸경상북도경찰부의 『고등경찰요사』, 1934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 ▸이상룡(행장)의 『석주유고』 ▸김희곤·류시중·박병원의 『국역 고등경찰요사』 선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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