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 문화원장의 철원땅 울진 사람들



민통선 안 개척민으로 울진을 떠나던 날

사라호 울진이재민, 군용트럭에서 초죽음


 


매년 4월 4일이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70년전인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울진군 근남면의 66세대 300여명의 주민들이 강원도 철원군의 황무지를 찾아 떠났던 날이다. 그분들이 이주한 철원 땅은 6.25전쟁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 DMZ였고, 곳곳에 지뢰가 매설된 위험천만한 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이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려야 했다. 조상의 뿌리가 있는 고향, 자손만대로 지켜야 할 고향 땅을 등지고 눈물 뿌리며 떠나가던 그 분들의 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근남면’ 이라 이름 지은 그분들의 고생담을 그들의 증언을 통해 다시 한 번 상기해 보고자 한다.

1959년 9.16일 ‘사라호’라는 큰 태풍이 우리나라 남해안을 거쳐 동해 남부를 강타했다. 중앙관상대는 큰 피해는 없을 거라고 예보했지만, 예보는 빗나가 한국의 남해와 동해안은 1900년이후 3번째로 강력한 태풍 피해를 입었다. 이 태풍으로 849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고, 농경지도 21만 6,325 정보나 유실된 끔찍한 재해였다.

울진지역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 데, 특히 근남면 산포리 일대는 왕피천이 역류하여 산포리 일대의 주택들과 농경지를 덮쳤다. 해일로 인하여 바닷물의 역류하고, 왕피천에서 내려오는 빗물이 빠지지 못하여 산포리 일대를 덮친 것이다.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농경지는 유실되고 패여서 자갈밭으로 변했고, 주택들도 모두 허물어지거나 물에 잠겨 고쳐서 쓸 형편도 안되었다.

학교나 동사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행정관서에서 나누어 주는 구호품 몇 가지로 연명하는 처지였다. 전답과 제방이 모두 무너지고 떠내려가 버려서 토지와 하천의 구분도 없다. 중장비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군부대의 장비 몇 대가 와서 도와주었으나, 제방 쌓는 것만도 해를 넘겨야 할 판이었다.

행정관서에는 이재민들의 생계대책을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고 있던 중, 마침 강원도 철원군에서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DMZ 개간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곳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금까지 황무지 상태로 버려진 땅인데, 개간하기에는 힘들겠지만, 넓은 농토의 경작이 가능하다는 잇점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철원은 옛날 궁예가 태봉국을 세울 만큼 비옥하고 광활한 평야지대였다.

그러나 6.25 전쟁을 겪으면서 지뢰밭이 되어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는 민간인 통제구역이 되었다. 이토록 위험한 지역이다 보니 여지껏 개간이 되지 않고 있었다. 군부대의 적극적으로 협조로 행정관서에서는 이주 희망자들의 신청을 받았다. 이재민들은 대대로 살아오던 조상의 뿌리를 등지고, 낯설고 물설은 타지로 이주한다는 것은 쉽게 결정될 일은 아니었다. 수 십 차례의 회의를 거쳐 이주 희망자를 받아보니 66가구에 300여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온 마을 사람들과 일가친척들의 눈물이 범벅된 환송을 받으며, 드디어 1960년 4월 4일 군용트럭에 몸을 실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들은 철원까지 도착하기 까지만도 엄청난 고생을 겪었다. 이들은 간단한 짐들만 조금씩 싸서 어린이 부녀자 할 것 없이 모든 가족들이 25대의 군용 트럭에 분승했다. 지금까지 손바닥 만한 좁은 농토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라 광활한 토지를 차지할 수 있다고 하니 큰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트럭 앞에는 헌병대 찦차가 에스코트를 하고 만약을 위해 앰브런스 한 대도 뒤 따랐다.

이재민들의 고생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군용트럭은 덜커덩 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따라 먼지를 날리며 달렸다. 이재민들은 평소 자동차를 많이 타 보지 않은 시골 사람들이라 얼마 안가서 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연이어 달리니, 아무리 멀미를 해도 내려 달라고 할 수도 없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하기도 하고 창백한 얼굴로 늘어져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멀미를 하는 바람에 트럭은 예정과 달리 자주 중간에 정차를 했다. 그러나 멀미가 쉽게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어린이들이나 노인들은 심한 멀미로 금방이라도 죽을 것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젊은 남자들은 ‘괜히 이주를 하자고 해서 생목숨 죽게 생겼다’며,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성격이 과격한 사람은 ‘어느 놈이 가자고 했냐?’고 인솔 군인에게 마구 쌍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옆 사람들이 겨우 겨우 달래고 또 달래서 진정시킨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에서 탈출할 때, 이스라엘 군중들이 모세를 원망한 것과 흡사했다.

얼마를 달렸을까 식사 시간인 모양이다. 일단 정차를 하고 배식을 했다. 식사는 군인들이 식사대용으로 먹는 C레이션이었다. 돼지고기 볶음 . 닭고기 볶음 등 기름진 깡통들이 몇 개씩 배부되었다. 멀미를 심하게 하는 사람들은 입에 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허기를 면하기 위해 억지로 먹는 이도 많았다.

그런데 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평소 기름끼 있는 음식을 먹어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라 갑자기 기름진 음식이 들어가니 설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통을 호소를 하며 설사에 시달렸다. 멀미로 토하고 배탈로 설사를 하게 되니 사람들은 탈수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들은 탈수증으로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아직 혈기가 남아있는 젊은이들은 또다시 인솔자를 원망했다. 당장 이주를 취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긴 가족들의 생사가 위태로우니 원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인솔 군인들은 그들의 화를 받아주며 정성을 다해 이들을 보살폈다. 4월 4일 울진을 출발한 트럭 행열은 다음 날인 4.5일 춘천에 도착했고, 그 다음 날인 4.6일 에는 화천에 도착하여 화천 초등학교에서 밤을 보냈다. 천막은 한 가족 당 1개씩 돌아갔지만, 아직은 저녁날씨가 쌀쌀해서 천막에서 잠을 자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았다. 그러나 종일 트럭에서 시달리고 멀미에, 설사에 시달린 사람들은 얇은 모포 한 장으로도 눕자마자 잠에 골아 떨어졌다. 화천에서 새우잠을 자고, 다음날인 4월7일 말 고개를 넘어 철원군 ‘마현리’에 도착했다,

철원에 도착한 이들은 또다시 힘든 상황을 맞이했다. 철원에 이주하면 이주자들에게 임시 거주할 거처와 식량 등 지원을 약속했던 기관장들이 갑자기 모두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를테면 4.19 학생의거가 일어난 것이다. 이주민들이 철원에 도착하자마자 대통령이 하야하고, 국무위원은 물론 장관, 도지사. 군수, 서장, 면장 등 기관장들이 모두 경질됐다. 이재민들을 지뢰밭 속에 데려다 놓고 세상이 바뀌었으니, 누구하나 이들에게 신경을 써 주는 이가 없었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그래도 군부대에서 임시 천막이라도 쳐 주어 잘 곳은 마련됐다. 당장 끼니가 없어 굶어야 되는 상황이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함 속에서 연대장이 쌀 2가마를 갖고 왔다. 이 쌀로 술을 빚으라고 했다. 이주민들은 술을 빚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조상들께 제사나 지내라는 마지막 통첩으로 알았다.

부녀자들은 연대장이 주고 간 드럼통에다 술을 담았다. 얼마 후 술 익는 냄새가 흘러나와 군인들의 근무지 까지 흘러 들어갔다. 어느 날 한밤중에 누군가가 이주민의 천막을 흔들었다. 열어보니 군인이 돈을 갖고 와서 술을 조금 달라고 하였다. 잠시 후 또 다른 군인이 와서 술을 사갔다. 얼마 안 되어 술을 빚은 드럼통이 바닥이 났다. 그 돈으로 이주민들은 식량을 구입해 봄을 넘길 수 있었다.

낮이면 일을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개간 작업에 매달렸다. 4.19 의거로 북한의 동정이 심상치 않으니, 군부대에서 중장비를 지원해 줄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부득이 인력으로 개간을 하기로 하고, 1조에 10명씩 배치하여 한 명이 쟁기질을 하고 9명이 소가 되어 끌었다. 온 들판에는 개간하는 사람들로 진풍경을 이루었다. 밭일을 하지 않는 부녀자들은 어린 애기를 이용해 돈벌이에 나섰다.

마을 주변에 흩어져 있는 쇠붙이를 주워 민통선 밖의 고물상에 파는 것이다. 민통선 안에서는 허락없이 마을 밖을 나갈 수 없다. 부인들은 애기가 아파 병원에 간다는 핑계로 주워 모은 고철자루를 허리에 두르고, 그 위에 어린애를 업고 말고개 검문소를 넘는다. 업고나간 어린이는 고개 넘어 있던 다른 아줌마가 다시 업고 돌아와서 또 다시 고철자루를 두르고 또 넘어간다. 어린 애기를 이용한 장사였다. 뚱뚱하고 뒤뚱거리는 걸음만 보아도 수상한 것을 모를 리 없었지만 군인들은 눈감아 주었다.
 

이렇게 고생하고 정착한 것이 벌써 70년 전의 일이 되었다. 이주민들은 말로 다하지 못할 만큼의 고생을 했지만, 자신들의 뿌리인 ‘고향은 잊지 말자!’ 는 뜻에서 지역 명칭을 ‘근남면’으로 지었다. 이제는 1세대는 거의 사망하고 2세대 3세대가 마을을 이어가고 있지만, 가끔은 울진의 고향 마을을 찾는다. 또한 서울 재경 군민회에도 가입하여 ‘근남면민회’로 매년 참여하고 있다. (20.3. 참고자료: 전혀 뜻밖의 유산‘, DMZ 함광복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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