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삼간의 행복 (22)

 

세계는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중심 사회로 급격히 이전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들의 권리회복 요구가 다소 과격한 페미니즘으로 전개되면서, 남성들은 역차별의 위기를 토로하기도 한다.

이미 우리사회는 남녀가 지니는 어쩔 수 없는 신체능력 차이와 본능의 욕구에서 오는 문제를 제외하면, 여성중심으로 정착 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생산과 소비라는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측면에서 여성들은 확실한 소비의 주체가 되었고, 생산력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앞선 여러 번의 글들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사회의 여성차별은 장남(장손) 중심의 재산상속이 자리 잡기 시작한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의 여성차별은 다른 문화권과는 결을 달리 하고 있다는 점이다. 크던 작던 어떤 잘못을 다른 잘못과 비교하여 합리화하려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그러나 인류문화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남존여비사상을 다른 문화권과 비교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비교를 통해야만 정확한 이해와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고, 특히 서구중심의 오리엔탈리즘에 동조하는 자학에 가까운 자기비하 문화인식에 반성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중세 중기부터 근대 초기까지 유럽, 북아메리카,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자행되었던 마녀사냥, 아버지나 남자형제들이 성폭행 당한 딸(동생)을 살해하는 이슬람권의 ‘명예살인’, 생리를 부정하게 여겨 감금시키는 ‘차우파디’, 여성들의 발을 기형으로 작게 만드는 중국의 ‘전족풍습’, 현재까지도 강력한 남성위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일본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성리학이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을 펼치면서도 여성들의 탈출구로서 불교를 용인했고, 인류 고등종교에서 유일한 여성사제(수행자)의 전통이 유지된 것은 양성평등이라는 측면에서 특별한 상징성을 가진다.

이처럼 다른 문화권과 비교해 보면 안주인이라고 불렸고, 바깥주인은 안주인이 하는 일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원칙 속에서 우리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의 삶을 살아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문화 전반에서 살펴 본 남존여비의 대강(大綱)을 마치고, <초가삼간의 행복>이라는 본래 주제에 충실할까 한다. 독자님들께서도 기억을 되돌려 마당은 시집 온 며느리가 하루에도 수 십 번 넘어야 하는 문전고개(시집살이)를 상징하고, 이제 막 걸음을 배운 돌 지난 아이가 마을이라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중간지대이며, 이웃과 소통하는 열린 공간으로서, 온돌과 함께 한옥의 특성이라고 했던 필자의 이야기를 상기해 주셨으면 한다.

텅 비어있는 마당은 이미 꾸며져 있는 정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공간이다. 바닥이 따뜻하여 침대나 의자 등의 고정가구가 필요 없는 온돌방은 이부자리를 깔면 침실이 되고, 밥상이 들어오면 식당이 되고, 길쌈을 하고 새끼를 꼬면 작업장이 되고, 책상을 펴면 공부방이 되고, 손님이 와서 다과를 내어오면 응접실이 되는 등 그 변화가 무쌍하듯이, 마당 역시 필요에 부합하여 그 기능이 언제든지 달라짐을 특성으로 한다.

이처럼 변화에 적응하는 우리의 문화는 음식과 언어 등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인 김치는 금방 담아 먹는 겉절이에서부터 익혀먹고, 묵혀먹고, 볶아먹고, 지져먹고, 국을 끓이고, 전을 붙이고, 보쌈을 싸고 등등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다른 음식들과 어울리다가 마지막에는 국물에 국수를 말고, 씻어서 쌈까지 싸먹는 그야 말로 시작부터 끝까지 특정조리법recipe없이 그때그때 달라진다. 언어 역시 감정을 나타내는 다양한 꾸밈말(형용사)은 물론 비속어라고 불리는 욕은 그야 말로 규정할 수 없다. 욕은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래 너 잘났다”처럼 어떤 말이든 감정을 같다 붙이면 성립된다.

우리의 변화무쌍한 문화는 최근 볼 수도 없고, 예상 할 수도 없으며, 동시다발이라는 측면에서 전쟁보다 더 큰 위협으로 다가 온, ‘코로나 19’의 세계적 확산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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