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 칼럼/ 초가삼간의 행복 23

 

인간은 자연환경에 적응하여 지역 나름의 독특한 생활양식(의식주)을 만들어 내었고, 그것은 문화라는 또 다른 환경으로서 민족의 특성과 시대라는 역사성을 담보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우리 때까지만 해도 예비군복을 입으면 사람들의 행동이 갑자기 달라졌다. 이처럼 형식(환경)은 태도를 결정한다.

따라서 주거방식은 사람들의 태도 즉, 민족성을 결정할 만큼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과거 한옥과는 방식이 다른 현재 아파트와 공동주택이라는 주거형식은 점차 다른 태도를 만들어 낼 것이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우리들의 정서 역시 지금과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한국인들의 창의력과 순간 대처능력은 중동건설 등 예측불허의 산업에서 세계 제일이라 평가를 받았고, 이번 코로나 대처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필자는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어떻게든 고쳐서 사용하려는 행동의 원천은 한상차림의 밥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 한국인들은 모든 음식을 한 상에 차려 놓고, 각자 입맛에 따라 새롭게 조합하여 먹는다. - 예를 들면, 삼겹살집 등에서 손님이 직접 가위를 들고 자르고 굽고 온갖 반찬을 넣어 밥을 볶는다. 이것을 본 외국인들은 한국은 고객이 셰프라고 할 만큼 이미 조리되어진 음식이라 할지라도, 본인의 직성대로 먹어야 속이 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을 대표하는 비빔밥에 대해서 여러 가지 평가가 있지만, 결국 누가 뭐래도 자기 입맛에 맞게 비벼서 직성껏 먹어야 성에 차는 고집스러우면서도 자유분방한 심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깟 밥을 비벼먹는 것이 무슨 대수냐 하겠지만, 꽃처럼 예쁘게 차렸다 하여 화반(華飯)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비빔밥도 벌겋게 비벼먹어야 제 맛이 난다는 사실을 알면서, 몇 년째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다수 있다. 그리고 아예 여러 가지 반찬이 한꺼번에 입으로 들어오면 맛을 느낄 수 없어 끝까지 비비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한국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비비듯 고집스럽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돈과는 무관하게 밤낮없이 매달려 성과를 내고, 자유분방하기 때문에 원칙이라는 기존의 틀을 깨고 누구도 상상 할 수 없었던 방법을 동원하여 결국 완성에 다다른다. 인륜과 도덕의 문제가 아닌 산업기술에서 원칙이라는 것은 경험의 답습일 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하면, 그것이 새로운 원칙이 된다. 이러한 기질 덕분에 뒤늦은 산업사회로의 전환에 있어 원천기술이 턱없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1등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상차림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은 온돌이라는 난방에서 시작되었다. 누차 말하지만 연기와 열을 분리하고 난방과 음식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부엌이라는 독특한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선조들이 열효율이 뛰어난 온돌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죽음과 같은 추운겨울 방안에 불을 피우고 거기에서 조리를 했을 것이다. 현재 입식주방이 방안의 식탁 옆에서 조리를 하는 구조로 되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주방은 방과 분리되어있는 부엌과 달리, 음식이 조리되는 순서대로 가져다 먹음으로서 소위 말하는 코스요리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부엌은 독립된 공간이므로 모든 음식이 한꺼번에 차려진 상(床)이 방으로 들어 올 수밖에 없었다.

선조들은 열효율을 높이는 대신 매끼 번거로운 한상차림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먹을거리가 한 눈에 들어오다 보니 그때부터 자기 입맛대로, 기분대로, 나름대로 먹는 방식이 생기게 되었다. 여기에 반찬이 많아지면, 예를 들어 반찬이 세 가지만 되어도-밥(★), 국(◎) 반찬(1), 반찬(2), 반찬(3)일 때-★123, ★◎3, ★321, ◎★123...,...등으로 맛은 수십 가지로 다양해진다. 이처럼 한국인은 매 숟가락마다 맛이 다른 창의적 식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습관이 되어 잘 모르지만 외국인들은 이에 쉽게 동의한다. 이 같은 한상차림의 변화무쌍한 식사에서의 경험은 코로나 대응에서 여지없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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