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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전 참혹했던 역사현장이 눈앞에
<김성준 문화원장> - 고산성 특집
울진의 최대 충절 유적지 복원 절실
2020년 10월 16일 (금) 17:57:54 [조회수 : 411] 울진신문 webmaster@uljinnews.co.kr

김성준 문화원장의 역사기행

 

오호라! 4백년전 참혹했던 역사 현장이 눈앞에 생생히...


왜병에 항전하던 고산성 병사 몰살, 피로 물들어

울진의 최대 역사 유적지 복원, 충절정신 어어야

 

임진왜란 유적 고산성 (古山城) 편

   

고산성 입구 / 성밑마을

 
   
김성준 울진문화원장
 
 

고산성(古山城)은 울진읍 고성리 산 3-2 일대로, 속칭 ‘성밑마을’ 뒷산이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 울진 주민들이 마지막 까지 죽음으로 항전했 유적지로서 잊지 못할 뼈아픈 사연들이 숨겨져 있다.
산성의 흔적을 그동안 지속적으로 관리하지 않아 옛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일부 석축이 남아있고, 망루의 흔적과 우물, 전답이 그대로 남아있어 방치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유적이다.
특히 마지막까지 왜군들과 싸우다 장열히 전사한 주호 장군과 그의 부인 열녀 장씨의 전설이 전해지며, 구만동 ,천고개,무월 등 임진왜란과 관련된 지명들이 지금도 그대로 불리어지고 있어 울진에서 가장 확실하게 남아있는 임란 유적이라 하겠다.


 

 

   
고산성에서 내려다 본 울진읍내리

○ 축조시기 및 규모

         ▲울진군지의 고산성 지도
고산성은 1899년에 편찬된 《關東誌》와 1982년에 만들어진 《朝鮮城郭一覽》에 보면 1396년에 축성하였고, 1558년에 개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산성에 대한 조사서에 보면 성벽은 높이 2.5m ~ 7.7m. 성문은 1개소 그리고 사방에 망루가 있다.
울진군지 성곽조에는 고산성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울진군지의 고산성 지도

「고읍성이 이태조 5년에 왜구의 분탕을 당하게 되자, 한성판윤 장순열의 상소로 외적 방어상 적절한 고산성으로 석축 移邑하니, 주위가 2,556척이요 高가 9척이다」.
 성안에는 ‘능허사(陵虛寺)라는 절이 있어 군치(郡治)를 하였다고 한다. 울진지역은 해안에 위치하다보니, 잦은 왜구의 침략으로 성을 여러번 옮겨다니며 군치를 하였다.
고산성에도 두 번이나 옮겨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울진군지에는 「명종11년 (1556)에 관찰사 윤인노와 현령 이언화가 상의하여 울진의 방어에는 고산성이 최적지라고 하여 다시 산성을 수축하였는데, 이때 영동의 9개읍에서 장정들을 출역하여 쌓았다.」라고 기록하였다.
9개 읍은 울진과 고성. 영월. 정선. 봉화. 강능. 영양. 통천. 간성 등 9개 지역이다.

 

○ 고산성의 잔존 유적

고산성은 해발 130여미터의 야산인데 정상을 중심으로 병풍모양으로 둘러처져 있고, 가운데는 농경지로 구성되어있어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전을 펼칠 수 있다. 더구나 우물도 3개소나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입보농성이 가능하다.

축성재료는 토석 혼축성인데 산책공원 조성사업으로 성벽이 많이 허물어졌으나, 군데 군데 옛 성벽이 남아있어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성의 형태는 그대로 남아있고, 남장대, 북장대, 서장대, 동장대 등 4개소의 망루터가 남아있다,

 

○고산성 주변 유적 및 전설

고산성 내에는 주자선생을 추모하는 도통사(道統祠)가 있다. 또한 가까운 지역에 주경안 효자가 임진왜란의 조기 종식을 위해 7년간을 하늘에 기도한 ‘축천대(祝天臺)’가 있다.

또한 성내에 서너채의 민가가 있었고, 주씨 일가들이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비어있다. 우물은 기록상 3개소이나 현재 우물 1개소가 남아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몇 천평의 전답이 휴경지로 남아있다.

또한 신안 주씨 및 울진장씨 소유 묘소가 여러 기 산재한다.

 

   

고산성 내의 도통사

○ 고산성의 함락

고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울진의 주민들이 모두 산성에 모여 ‘주호’ 장군의 지휘아래 결사항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산성내에는 농경지가 많아 장기전에 유리하여 입보농성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왜병들은 수일동안 산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하자, 장기전을 펼쳤다. 성내로 진입하는 도로를 차단하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자를 막았다. 성내의 우리 병사들과 주민들은 장기전을 펼치게 되면 아무래도 군량미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왜군들이 노린 것이다.

성내의 병사들은 식량을 최대한 아끼면서 버티고 있을 즈음, 왜군들은 산성 아래쪽 하천에서 파티를 열었다. 여름날 달밤에 모닥불을 피워 주위를 밝히고, 고기를 굽고 미녀들을 동원하여 춤을 추게 하니, 성안에 있던 주민과 군사들은 모두 고기 굽는 냄새가 사방을 진동하는 서장대 쪽으로 몰려갔다.

군사들을 한쪽으로 유도한 왜군들은 산성 뒤쪽의 가파른 북쪽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니,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앞에 창과 칼로는 대항할 수 없었다. 성내의 아군들은 모두 참살당했다. 이때가 1593년 8월이었다. 城 중앙으로 난 작은 계곡에는 피가 강물처럼 흘렀고, 지금도 바위들이 붉게 물들여 있어 ‘핏골’이라 부른다.

왜병들이 남편 주호 장군의 시신을 잡고 통곡하는 아내 ‘장씨’의 미모를 탐내 젖가슴을 만지려하자, 낫으로 자기의 양 젖가슴을 베어 왜병들의 얼굴에 던지며 죽어갔으니, 왜병들이 놀라 시신에 표를 해 두었다고 한다. 임란 이후 장씨의 일이 조정에 알려져 영인(令人)을 하사받았고 정려를 받았다. 정려각은 지금도 화성리 鷹眠洞에 있다.

 

   

죽변면 화성리 鷹眼洞에 있는 열녀장씨 정려각

○ 임진왜란과 관련된 지명

고산성 주위의 마을들이 임진왜란과 관련된 지명들로 지금도 불리우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정찰병이 스님을 가장하고, 안개가 자욱한 날 고산성 아래 마을에 당도해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고산성이 어디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왜놈의 첩자임을 직감하고, ‘고산성은 고개를 천고개나 넘어, 만리 만리 구만리를 가야 한다’고 대답했다. 왜군의 첩자는 자기가 길을 잘못 든 것으로 알고 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데, 지금도 산성 주변 마을의 지명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산성 밑에 있는 마을이 성밑 마을이라는 뜻의 ‘성저동 (城底洞)’이고, 성 입구 마을 이름이 ‘천고개(靑皐洞)’ 이며, ‘구만동(九萬洞)’이다. 그리고 노파가 왜군의 첩자를 만난 고개를 고파목(古坡峴)’이라 부른다. 그리고 달밤에 고기를 굽고 춤을 추었다는 인접 마을 명이 ‘무월동(舞月洞)’ 이다.

 

   

달밤에 춤을 추었다는 무월(舞月) 마을과 하천/호월1리

 

참고문헌

≪ 蔚珍郡誌≫

≪新增東國輿地勝覽≫

≪大東地志≫

≪世宗實錄地理志≫

≪輿圖備志≫

≪關東邑誌≫

≪朝鮮城郭一覽≫

≪울진군 城址遺蹟 地表調査報告書≫.1998, 안동대학교 박물관

≪울진의 얼≫ 1988. 울진군

≪한국 고대사회와 울진지방≫.1998. 한국 고대사 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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