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돌만 남부지사장 후포역사연구회장

[울진칼럼]한반도에서 언제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어떠한 품종의 벼 였을까?

벼농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설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1991년 6월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 유적지의 신석기시대 토층에서 B.C 2300년 전의 자포니카계(인도), 볍씨 4톨이 발굴됨으로 해서 우리 땅의 벼농사 기원을 그 무렵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이 땅의 수전농사 기원의 갱신과 벼 재배의 기원은 이보다 더 앞 시대로 올라 갈것 같다. 2003년 10월 30일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발견된 고대 탄화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중국 후난성 볍씨보다 3천년이나 더 오래된 볍씨라면 지금부터 몇천년전일까?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검증된 중국 후난성 출토볍씨보다 약 3000년이나 더 오래된 세계 최고의 볍씨가 한국에서 발견 되었다고 충북대 이융조(선사고고학)교수 연구팀이 영국 BBC 방송을 통해 2004년 10월 22일 발표했다.

탄소연대측정법 시험을 통해서 얻어진 고대 탄화볍씨 59개가 전부였다. 그리고 이 볍씨가 야생벼가 아니라 재배벼라고 밝혀 1만 5000년 전에 한반도 중부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졌다고 할수 있다. 벼농사는 윈래 화전이나 산전에서 시작됐다. 화전 벼농사는 조선 초기까지 그리고 산전 벼농사는 지금까지 이어오지만 이와 함께 수전 벼농사도 상당히 오래 전에 도입된 것 같다.

이제까지는 수전농의 시작은 (수서 동의전) 신라조의 ‘전심양옥 수륙겸종’(田甚良沃 水陸兼種)의 ‘수륙겸종’ 즉 “물이 있으면 물에 파종하고 없으면 밭에 건파를 한다”와 「삼국사기」 신라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조에 “21년 (기원 330년)에 처음으로 벽골지를 개척했는데 그 연못의 길이가 1천800보였다”라고 한 기록 등에 의존해서 오래되어도 기원전2~3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밀양시 산외면 금천리에 청동기 시대 초기(B.C 10세기-3천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5천평 규모의 논터와 그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인근 하천의 보 말뚝을 2003년 5월 28일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보도는 수전농의 기원도 약 7백년 더 올려잡아 3천년전이 될 것 같다.

이러한 것을 청동기 초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그 논터에서 신석기시대 말기의 빗살무늬토기와 돌칼 돌도끼 등과 함께 출토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전농은 물로 짓는 농사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논에 물을 끌어 들였을까? 가장 원시적인 수리시설은 보(洑)다.

보는 스스로 스며 나오는 지하수다. 산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물에다 큰 돌이나 말뚝을 박아서 튼튼하게 다시 돌이나 흙으로 막아서 물이 수로를 통해서 논으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논으로 못 들어오게 막고 날이 좋으면 다시 수로를 통해서 논으로 끌어 들인다. 그래서 이 보수리(洑水利)를 방천관개라 하기도 한다.

지금보면 대단히 원시적인 시설이긴 하지만 수전 관개의 시작이고 지금도 일부 산간지방에 남아있는 가장 지속 가능하고 생태적 관개법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이른바 관정개발이란 이름으로 그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이러한 수리시설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보(洑)는 수전농업의 시작과 함께 축조 되었을 것이고 김제의 벽골제가 신라시대인 서기 330년경에 축조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마 그 무렵 이전부터 축조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앙모의 시작은 수리시설과 같이 발달하였다고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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