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하자마자 낙동강하구언 58억짜리 공사 수주 /원남 오산2리출신, 26년간 현대건설 재직

검정고시로 중,고교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입사,남다른 기술력과 성실함으로 정주영회장의 눈에 띠어 1년에 두 번씩이나 표창을 받고, 쟁쟁한 일류대 졸업생들과의 경쟁을 물리치고 입사 9년만에 과장으로 승진했으나, 명예퇴직했다가 다시 입사하여 공사부장으로까지 승진하여 퇴직하기까지 26년간을 현대맨으로 젊음을 불살랐던 해륙개발의 재부 출향인 강용수(57세) 대표.

그가 현대건설에 재임할 동안의 주위로부터의 받아 왔던 신뢰는 금년 5월말 퇴임후 지난 6월23일 건설회사를 설립하자마자, 7월1일 수자원공사가 발주한 서해건설의 낙동강하구언 건설공사에서 58억짜리 단일공사 물량을 수주받았다.

또, 지난 8월에는 해운회사를 설립하고 리모컨으로 조정이 가능한 최첨단 2600P급 바지선 2대에 300톤급 해상크래인을 장치하여, 지난 9월초 낙동강하류를 연결하는 PIRE 설치공사 현장에 투입했다.
어찌보면 느지막히 건설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그의 기술력과 능력은 한국건설업계가 인정하여 울진출향인으로서 틀림없이 또 한 분 큰 사업가로 성장. 한국산업계에 울진의 이름을 올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서두에서 그의 어려웠던 성장환경이 슬쩍 언급되었지만, 그도 성장기 집안환경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는 그의 남다른 노력과 성실함으로 맺은 두터운 인간관계와 다방면에서 습득한 경험과 지식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72년 월남파병, 73년 귀국 제대하고 현대건설에 입사하여 정회장의 눈총(?)에 여러번 맞아 현대중공업(조선부)에 노사분규가 났을 때는 중공업으로 특파되기도 했으며, 현대미포조선 사장의 권유로 회사를 명퇴하고 미포조선에 납품업을 시작했다가 부도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는 그를 버리지 않았다. 다시 현대건설에 재입사를 허락했고 싱가폴, 인도네시아 현장, 낙동강하구둑공사, 성서-강창간 도로확포장공사, 리비아 담수화 발전소건설공사, 영광원자력, 인천신공항건설 현장 등 굵직 굵직한 현장에서 공사부장으로 재임하다 퇴직하기까지 힘들고 어려운 현장에는 강용수가 있었다.  

그의 일에 대한 투철한 책임감과 성실함이 처음으로 인정 받은 것은 현대건설 입사 초기 현대미포조선 건설사업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다. 모든 직원들이 퇴근한 후 현장을 둘러보다가 수압밸브 균열로 물이 솟구쳐 대형사고로 이어질뻔했던 것을 조기에 발견 막아낼 수 있었는데, 이때 사건현장 옆을 지나던 정회장의 눈에 띄면서였다.

이후, 그는 76년도에 또 한번 현대에 신화적인 큰 업적을 남겼다. 현대건설이 당시 국내 건설업체 해외수주 건설공사 계약금액으로는 최고였던 10억불이라는 사우디 주베일 오일터미널 공사를 따냈다.

그런데 이 공사를 위해 한국에서 장비와 자재를 싣고가던 해상 프로팅크레인이 대만 해안선에서 4킬로미터 깊숙한 육지에 좌초했다. 현대측은 비용에 상관없이 이 배를 인양해야 했다. 대만의 기업체 측에서도 손을 들었고, 최종 대만 해군측에서도 포기했다. 현대의 직원들도 지친 나머지 퇴사할 각오로 상부의 지시도 받지 않고 귀국해 버렸다.

이때 현대는 3명의 직원을 현지에 특파했다. 훗날 현대미포조선의 사장이 되었던 당시 현대조선의 백충기이사, 배를 운전하는 기술을 가졌던 당시 현대건설의 강용수 대리와 신수명 전기기사였다.   강용수 대리는 한번 해보자고 했고 백이사는 강용수를 믿어 주었다.

그들은 4킬로미터를 쇠줄로 연결하고 약 2천명의 주민들을 동원, 밀물을 이용하여 동시에 끌어당겨 인양에 성공했다. 34일만이었다. 현대가 놀라고 대만이 놀랐다. 강대리는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무좀이 심해 두 발 전체가 부어 올라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나중에 백충기 사장은 강용수 대리의 보증수표가 되어주었다. 친구가 납품대금을 들고 달아나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다시 사업을 권유하기도 했으며 그는 강용수 대리의 현대 재입사의 보증인이 되어 주었고 금번 강용수 사장의 사업에도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는 원남 오산2리 초산에서 어부의 4남2녀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유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병이 들어 연중 절반이상 5~6년간을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해야했다. 중학교 2학년 봄, 선친이 별세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하고 17살이 되던 해 후포 동림수산에 입사하여 군대 가기 전까지 배를 탔다.

그는 입사하면서 현재의 인터불고 그룹 권영호 회장에 대한 당시의 평가를 가슴에 새겼다. 같은 동림수산에서 배를 타 강사장과 같은 일을 하였다는 권회장은 그가 입사하자 군입대하여 만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은 권회장의 성실함과 향학열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권회장을 닮겠다고 마음을 먹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결국 그는 대구 강창고속도로 건설현장에 일하면서 영남대 토목학과의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그는 말한다. 자신은 전국을 돈다. 울진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랜다. 고향마을과 추억이 되살아난다. 1~10번 국도중 아직까지 4차선이 안된 것은 7번 국도 뿐이다. 울진사람들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정직과 성실”이었다.

그는 77년에 결혼, 딸 둘과 아들 하나. 고향집에는 노모가 계신다. 현재 재부군민회부회장으로 차기회장에 내정되어 있다.
                                                              / 안정권 부산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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