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가는 길

       
본지는 금번호 부터 울진출신으로서 한국 현대 사회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분들을 찾아나서 그분들이 살아온 삶과 인생을 연재한다.

현대사 울진의 걸출한 인물들을 들자면 물론, 사람들의 개별적 관점이나 한국적 특수상황 속에서는 견해를 달리 할 수 있겠으나, 먼저 사상 철학계의 천재 최익한,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을 기초했다는 김광준 전 국회의원을 꼽을 수 있겠다.
 
그 외에도 찾아보면, 정치, 사회, 종교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이들이 많다. 그러나 아직은 가치 판단을 보류하더라도 최익한, 김광준 이 두 분의 이름만큼은 울진사람들이면 기억해야 할 울진의 자부심이다. 이미 작고하여 그들의 꿈이나 삶을 들어 볼 수 없는 것이 큰 아쉬움이다.
 
금번호부터 첫 번째로 약 5회 연재할 울진의 인물은 장한기(75세, 현 동국대 명예교수) 박사다. 그는 한국 연극영화계 이론적 기반을 구축하고 동국대학에 연극영화과를 설치한 장본인이다.
 
20여년간 연극영화학과 학과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 연극·영화계의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한국 방송 연예계의 인적재원을 공급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지난 02년에는 거금 3억원을 출연하여 사회복지 법인 <신곡>을 설립, 불우 청소년들의 장학금을 지급해 오고 있다.
                                                                   - 편집자 주-




…나의 自傳的 이야기 I

5, 60여 년 전 서울 유학 시절의 일이다. 서울을 떠나 보통 삼일 만에야 울진(蔚珍) 읍에 닿았고, 읍내에 내리면 으레 해거름 깨가 아니면 한 밤중이었다.

무거운 책가방을 챙겨들고 「골패목」과 「성밑」 앞을 지나 「오랑챙이」, 「아치말」을 향해 거랑을 몇 개 건너뛰면 벌써 「시글장등」, 솔밭 사이로 내달아 고갯길 논둑을 내려오면 벌써 「사계」 앞, 모래밭을 한참 지나면 「습실」 동네 어귀에 있는 성황당, 그 앞에 넓죽 엎드려 절 한번 하고 나면, 소곡국민학교가 눈앞에 나타나고 윗마을의 와가 한 채가 감나무 사이로 보이던 곳이 바로 내가 태어나고 내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께서 차례로 이 세상을 하직하고 가신 그 예전의 우리 집이었다.

이렇게 중학시절, 방학 때만 되면 나는 헐레벌떡 내 고향 생가를 찾아가곤 했었다. 나는 고향을 생각할 적마다 울진 모든 곳을 머릿속에 떠올리기보다 내가 태어난 곳, 그때나 지금이나 20여호에 불과한 부챗살 모양의 아늑하고 조금은 높은 듯한 내 생가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 뒤에는 우람한 송림과 그 산이 멀리 멀리에서 뻗어내려, 그 줄기를 찾아 올라가면 시치봉(峙峠峯 =鼎峯)과 태백준령에까지 이르게 된다.

내 어렸을 때 친구 南모는 이곳을 「屹立鼎峯淸洌蘇潤」이라 하여, 내 회갑을 축하해 주었고, 그 글을 내 회갑 논문집에 싣게 했다. 마을 앞은 그런대로 문전옥답이 둘러있고, 그 앞에 지금 보면 그리 크지 않은 내(川)가, 어렸을 적엔 그리도 크고 넓은 백사장이었다.

양쪽에서 마을을 끼고 내리는 맑은 물과 백사장은 그야말로 우리 동리 개구쟁이들의 훌륭한 운동장이었고 씨름판이 되기도 하였다.

그 내와 옥탑을 지나면 저 멀리 고려충신 정포은(鄭圃隱) 선생의 손자, 애총이 있다던「돌재」 산마루까지에는 동산이 겹겹으로 가지런히 내려와, 동트는 새벽, 안개라도 피어오르는 날이면 마치 하늘의 천사가 천의(天衣)를 날리며 백마를 타고 내닿는 듯한, 이 진취적인 기상과, 저녁 무렵 오색구름의 그 장관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곳 동산은 항차 추수기가 되면 벼나락이 깔리는 좋은 건조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거기엔 빠알간 고추잠자리가 날았고, 이른 봄 장다리 밭에서는 언제나 하얀 나비, 노랑나비가 날았다.

그때 그곳의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은 지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니었고, 그때의 순후한 인심은 그렇게도 못 살았으면서도 오늘의 인심이 또한 아니었다.

한겨울에도 우리는 맨발에 벌거숭이 배를 내어놓고 자랐었다. 그러한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해를 보낸지도 어언 60여 성상, 많은 회한과 감회가 인다. 나는 지금도 양지바른 내 생가와 내가 자란 고장을 생각할 적마다 마음은 한없이 한가롭게 여겨지며 평화를 누릴 수 가 있다. 그래서 나는 한 해 한 두 차례 이곳을 찾아간다. 그 자연과 분위기만으로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어쩌면 그곳엔 내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할머님의 무덤과 또 나와 내 아내가 묻힐 영면의 한 조각 땅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나의 自傳的 이야기 II
 
한 칠십 년 전, 어려서는 유독 겁이 많아 겁쟁이로 놀림 받던 한 아이는 커갈수록 무용(武勇)을 기르고 모험을 즐긴다. 그래서 그는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해 학교에 갈 때는 번번이 중간에서 빼먹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날은 산에 올라 작은 나뭇가지 사이에 둥지 튼 새집을 찾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꾼을 따라 깊은 산으로 가기도 했었다.

어느 날 산속에서 둥지 튼 새집을 발견했는데, 그 둥지 속에는 새알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소년은 매일 한 번씩 거기로 가 둥지 속 새알을 살폈다. 며칠 안 되어 그 알에서는 고물고물 새끼가 기어 나왔고 며칠 후엔 눈을 뜨더니, 또 며칠 후엔 온몸에 털이 나면서 입가에 노란 색도 제법 어미를 닮아 팥빛으로 변해갔다.

새끼들은 소년이 다가가면 아는 듯 모르는 듯 먹이라도 달라는 듯 입을 짝짝 벌리고는 하였다. 물론, 그때마다 어미 새는 언제나 경계하듯 주위를 맴돌았다. 소년은 갈 때마다 지렁이며 벌레들을 잡아 하나씩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면 새끼 새들은 나래를 파닥이며 기걸하듯 삼키고는 하였다.

어미 새는 가끔 이런 모습을 다른 나무위에서 훔쳐보고 있었다. 또 며칠이 지나자 드디어 새끼들은 둥지에서 나와 어미와 함께 나는 연습을 하듯, 옆 가지로 날아 겨우겨우 오르곤 하였다.

소년은 그래도 며칠만, 며칠만, 하였다. 좀 더 어미 새가 되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그곳으로 갔을 때, 새는 둥지만을 남겨 놓은 채 날아 가버리고 없었다. 새끼들은 물론, 항시 주위를 맴돌던 어미 새도 보이질 않았다. 완전히 떠나고만 쓸쓸한 빈 둥지만이 그 속에 놓였을 뿐이었다. 주위조차 그렇게 고즈넉할 수가 없었다. 아마 위험을 경계하고 두려워한 탓이었다.

소년은 이렇게 어리석고 자기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그 날의 허전함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마치 한 마을이 뭉텅 떠나간 폐허의 마을처럼 쓸쓸했던 그 산속 분위기는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해가 아주 잘 비춰지는 산속 수풀 속이었는데…….

소년은 또 어느 날, 나무꾼이 잡아다 준 새 새끼 한 마리를 가지고 놀다가 그것이 숲속으로 날아 들어가자 찾다 못 찾아 울던 생각을 한다. 또 어느 날인가는 제집 일꾼이 콩밭에서 어미 따라 모이 찾아 나왔던 노루 새끼 한 마리를 잡아와서 주길래 어찌나 좋았던지 나무로 집을 짓고, 먹을 것도 듬뿍 넣어 주었는데, 하룻밤 자고 나 새벽에 일어나 보니 온데 간데 없어 이를 다시 잡아오라고 며칠을 뒹굴며 떼쓰던 때가 엊그제 같다.

뿐만 아니라 그 아이는 할머님 속도 무던히 썩히면서 자랐다. 우물가 도르래가 달려 스무 길이 넘는 아슬아슬한 꼭대기에서 물구나무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까마득히 높고 높은 감나무 가지에 한 다리를 걸고 밑을 보며 할머니를 찾아 일부러 애간장을 태우게 하며 놀던 일 하며, 삼대독자인 아들 귀한 집안에서 일찍 어머니를 여윈 그 아이는 그 하나를 바라고 사시는 할머님의 속을 무던히도 썩이고 자랐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에 가 계셨던 아버지와 계모에게 납치되어 서울로 갔다. 아버지께서는 그 아이를 서울 학교에 입학시킴으로써 할머님은 자연 따라서 오실 걸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시골 재산도 처분할 수 있는 것으로 믿으셨다. 아버지께서 시골에 한번 내려오시기만 하면, 한 고을, 한마실의 전답이 몽땅 팔려 다른 이의 명의로 넘어가곤 하였다.

그만큼 그 아이의 본집은 남의 군 경계를 지나서도 제 땅을 밟고 갈 수 있는 한 지주의 장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달이 못되어 할머니께서는 이웃 일가 한 분을 대동하고 그때 보통 3박4일이나 걸리는 서울로 손자를 찾아서 왔다. 그 아이도 신기하고 어리버리한 서울에서 매일 할머니를 찾아 울던 차 밤중, 잠결에 눈을 뜨고 보니 그는 할머니의 무릎위에 있었다.

할머니는 하룻밤 눈도 붙이시지 않은 채 그 아이를 데리고 다시 시골(울진)로 내려왔다. 그런 할머님의 속을 하나밖에 없는 이 아이는 그렇게도 많이 많이 태우고 자랐다. 향리에서 소학교를 마치자, 서울 유학을 할머니도 말리시진 못하셨다.

방학마다 그 아이는 할머니를 뵈러가는 것이 소원이었고 할머니께서도 더없는 바램이셨다. 하지만, 소년은 중학교에 가서는 기예(技藝)나 문장에도 소질이 있다는 주위의 칭찬에 잘했으면 연극배우도 되고 소설가도 될 뻔하였다.
-계속-


<장한기 박사의 주요약력>

문학박사/ 1930년 울진북면소곡2리에서 父 張炳郁, 母 田又江의 長男으로 出生/ 조모 슬하에서 울진 제동학교를 거쳐 울진초등학교 졸업/ 서울농업학교를 나와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과 동시에 극작가, 문학평론가로 데뷔/ 선린상고 교사를 거쳐 1958년 동국대 교수, 서라벌예대, 중앙대, 성신의대, 세종대, 한국외대 대학원등에서 석, 박사학위지도/ 서울시 교육공로 표창과 동랑 유치진연극상,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여받다/ 현재는 동국대 명예교수로 재직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