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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기박사
나의 삶 나의 사랑/ 나의 自傳的 이야기 -5
우리 할메
2007년 05월 04일 (금) 09:06:22 [조회수 : 2223] 편집부 webmaster@uljinnews.com

 

   
 
 
 
내 어렸을 적, 우리집에는 두 분 할머니가 계셨다. 한 분은 남들이 노할메라고도 불렀고 ‘순자할메’라고도 불렀다. 또 한분 할메는 굴뚜만할메, 혹은 ‘한기할메’라고 호칭했다.

노할메, 순자할메는 우리 굴뚜만 할메보다 아주 연상인데다가 내 누이 순자를 맡아서 키우셨고, 또 내 ‘굴뚜만 할메’ 는 체격이 원체 부하신 데다가 언제나 내 차지가 되었기에 나와 남들도 모두 그렇게 불러 주었다.
 
우리 할배는 일곱 살인가 여덟살, 그리고 노할메는 열두살 때 시집을 왔으나 후사가 없으셨고, 그래서 우리 할배는 다시 삼십이 넘어 우리 조씨 (漢陽趙氏) 할머니, 즉 한기 할메에게 새 장가를 드시게 되었다고 한다.

한 백오십년 전 이야기이다. 그 할매 열몇살 때라고 한다. 우리 한기할메는 십여세 위이신 할배에게 처녀 시집을 와서 두 남매를 두셨으니, 그 중 우리 아배는 우리 할배나이 쉰이 가까워서였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순자할메와 내 한기할메의 나이 차는 근 스무해의 차이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한기할메는 후사가 있는데다가 아들까지 두셨으니 온 집안에서는 떠받들렸고, 그 권위와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 내 어머님 몸에서 내가 또 장자로 태어났으니, 나는 그 굴뚜만할메의 차지가 되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내 누이 순자는 자연 노할메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옛 풍습대로 집안 어른들의 공경과 차례는 언제나 노할메께 우선했고, 귀한 것이 있으면 먼저 노할메께 바쳐졌다. 그래서 우리 한기할메는 때로 내가 부를때는 큰 할메라고도 불렀지마는 이것은 할머님의 체구에서 온 호칭이오, 그러면 남들은 나를 야단도 치셨지마는 나는 계속 노할메에겐 또 작은 할메라고 호칭하며 자랐다.

어쨌거나 그 굴뚜만할메는 할배께서 돌아가신 후론 집안의 모든 경제권을 독차지 했을뿐 아니라, 광과 도장 열쇠까지도 함께 한기할메 차지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집엔 일꾼들과 그 가솔, 부엌 식구들도 여러명 이어서 때론 스무명에 가까운 식솔들은 모두 내 굴뚜만 할메 손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아침 점심 저녘끼니들은 모두 우리할메 손에 메었기 때문이다. 죽이면 죽, 밥이면 밥, 그것도 맵쌀과 좁쌀, 보리등 주는 대로 받아 거행되곤 했다. 그러니 내 어렸을적 한기 밥만은 할메 손수 다른 솥에 안치거나 한 솥에 하더라도 큰 솥 한쪽에 따로 몰아 한데 섞이지 않게 하였다.

언제나 흰 쌀밥만이 내 상에 오르곤 하였다. 나는 보통 그 별식만을 먹다가도 혹 일꾼들이나 아낙들이 맛있게 먹는 잡곡밥이나 감자 혹은 범벅 같은 것도 청해 먹을 때가 있었는데, 그럴때마다 우리 할메는 언제나 들으란 듯이 ‘우리 한기도 이것을 꿀맛같이 먹는데, 그래 너희들은 배가 불러 먹는 것도 타령이더냐? 하고 꾸짖으신다.

그것은 내가 이집안 삼대독자나 다름없는데다가 이 집에서는 남자 일꾼들을 빼고는 사내란 나 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다. 그 후 어머니께서 또 일찍 시집와 우리 두 남매를 남기시곤 일찍 스무일곱살 꽃같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자 더욱 나는 이 집안의 소중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님 가시고 할아버지께서 또 2년후 세상을 뜨시니 참 식구라야 우리 두 남매와 두 할메 밖엔 없었다. 내가 열넷 되던해 노할메도 떠나고 집에는 누이와 할메밖에는 없었다. 나는 소학교를 마치자 아버지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방학때면 영낙없이 할메 보러 고향으로 내려왔다.

중학 6학년에 6.25가 났고, 나는 걸어서 십일만에 고향 할메를 찾아와 있었다. 전쟁은 밀리며 밀며 오르고 내리고 하는데 나는 무슨 병엔지 걸려 사경을 헤맨때도 있었다. 이때 할머님의 낙망,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실망이었다. 그때 나는 병마에서 좀 헤어나자 일기를 썼다.
 
그때 일기장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었다. 1952년 11월 4일. 음력 9월17일. 맑음

오늘따라 할머님의 모습이 더욱 초췌해 보인다, 마당어귀에 몇 구루 선 감나무 가지에선 몇 알 남은 잎파리가 하나 둘 떨어진다.

빠알갛게 물들던 고운 잎이 이리저리 어지럽다. 할머니와 순자는 마당에서 노오란 서숙을 칼로 똑 또옥 짜르시고 나는 짤리운 황금같은 조이삭 위에 올라서서 맨발로 부벼대며 가을 추수를 돕는다, 할머님의 쳐지신 눈꺼풀과 그 안광에도 어쩐지 힘이 없어 뵌다.

같은 12월 13일. 토요일 음력 시월 27일. 벌써 이틀째 밤마다 꿈에서 몹시 원통하게 울었다. 어젯밤에는 뒷집 재당숙모를 붙들고 서럽게 서럽게 울고, 오늘밤은 억울하여 목을 놓아 울었다.

하루종일 무슨 불길한 일은 없을까하고 마음조리다. 시치골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니 병석에 계신 할머니께선 전에 볼 수 없으리만큼 병세는 더 한듯했고, 내 가슴과 머리는 빠게질 듯 답답하고 어지러워 안절부절하다.

같은 해(임진년) 12월 18일 목요일. 음력 11월 2일
할머님 병환에 약간의 차도가 있는 듯한데, 일꾼들이 메고 들어온 큰 송판짐이 마당에 들어설 때 내 가슴은 섬뜩해오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밤에 누이는 할머님 차고 가실 저승주머니를 알롱달롱 수놓아 꾸몄다. 아 ! 저것이.......

그로부터 꼭 일주일 만에 할머님은 영영 눈을 감으셨다. 향년 77세. 기일(忌日) 은 임진년(壬辰年) 11월 9일 아침, 그날따라 우리할메 성품처럼 겨울같지 않은 포근한 날씨였다. 허나 할머님께선 그 운명하시든 날 나와 아버지를 그 옆에 못있게 하시곤 내 누이 하나만을 지키시게 하였다.

나와 아버님은 평생 떠나 살았고, 누이 순자만이 효도를 다한 탓도 있으려니와 그 보다 그가 아직 과년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할머님 손으로 육례를 치루지 못하시고 가는 그 아쉬움이 크셨으리라 생각된다.

내 나이 열두서너살때까지도 나는 항상 할메 옆에 있는 날이면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언제나 응석을 부리고는 하였다. 가슴에 손을 넣어 우리 할메 젖과 그리고 황소처럼 쳐지신 목살을 좌우로 흔들면서 놀던 생각, 그 정이 그립기만하다.

어머님도 스물일곱, 일찍 떠나시기도 하였지마는 나는 한번도 친어머니를 어머니! 하고  불러본 기억도 없으려니와 아직 오늘 이때까지 어머니란 소리 한번 불러오지 못한 나였다.

그리고 할머님께 나로서도 효도라면 효도랄까, 우리할메 돌아가실 때 그 저승 주머니 속엔 내 평생 처음타본 상금 2만원을 그 속에 넣어보낸 일이다. 할머님께선 언제나 손부 손에 따뜻한 물한 모금이라도 받아 자시는 것이 그리도 소원이셨다.
그것을 해드리지 못한 이제 나는 지금도 우리할메 산소를 찾을때면 그 용서를 빌곤한다.   (계속)

 상금 2만원
그 상금은 6.25 사변 때,  휴전 전 나는 고향에 있었고, 운명하시기 수일 전 당시 군(울진군네)웅변대회에서 일등상으로 일금 5만원을 받아 그 중 2만원을 할머니 저승주머니에 노잣돈을 보내 드린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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