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군에서 전출 부산시 서기관 임업직 최고위직 올라
부지런해서 별명 '25'시 부인사업 도와 사업도  성공

   
김선일 부산시 녹지사업소장자그마한 체구, 그러나 빈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다부진 인상,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첫 눈에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1950년 근남면 노음2리 오른갈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울진중·고 졸업 성적 2위/ 방통대 농학과, 경성대 행정학과, 부산대 행정대학원 졸/ 68년 울진군 임업직 공무원 임용/ 81년 울진군 민방위 훈련계장/

81년 부산시로 전출/ 94년 부산시 사무관 승진시험 1등 합격/ 수영구청, 동래구청 경제과장, 시청녹지계장/ 04년 서기관 승진~ 현재 부산시 녹지사업소장/

83년 총무처 정부 모범공무원 선발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표창 수상/ 96년 수영구청 전국최우수구청 선정 공로로 대통령 표창 수상/ 04년 부산시청 녹지행정공로 대통령 표창/ 재부울진군민회 10년째 부회장 및 감사/ 재부울진중·고동문회 직전회장/ 재부 근남면민회초대회장/ 진우회 현 회장이 그의 요약된 이력이다.

그의 약력에서 벌써 비범이 엿보인다. 시골 농가의 9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굶주렸을 것이고,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공부를 잘했다는 것은 결국 매우 영리한 사람임을 알 수 있겠다. 학창시절 웅변과 그림에도 소질을 보여 도 및 중앙단위 까지 출전하며, 입상도 많이 했다. 그의 형제 7남매가 부부공무원이다.

울진군은 너무 작은 지역이라 승진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불쑥 부산시 인사담당자를 찾아가 자신의 명함을 건네고 온 당돌함 아니, 그것은 당찬 그의 추진력이었다.  향학열은 높으며, 대통령 표창을 세 번이나 받은 것을 볼 때 유능한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력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울진 촌사람이 부산시 15,600여명 공무원 중 임업직으로서는 최고위직급이 2명뿐인 서기관에까지 승진했다는 것이다.

처음 부산시로 전입되자, 산림법 위반 사건을 다루는 업무를 맡기고는 업무처리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더라는 것. 그는 퇴근 후 울진으로 달려 와, 당시 울진군 윤병용산림과장과 임영수계장으로 부터 밤새워 배워 그 다음날 정상 출근하여 업무를 처리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공직생활 중 누구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고향사람들의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가 울진군 공무원 2명을 부산시에 전입시켜 한명은 정년퇴임했고, 한명은 현재 부산시 반여농산물도매시장 운영과장 정성교 사무관이다.

이제 정년을 1년여 앞두고 후배들을 위해 명퇴할 계획이다. 이제 어디든 기회가 되면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펼쳐 보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오전 8시경 약속장소인 ‘남천낙지’ 집을 찾았을 때, 그는 등산복차림이었다. 마침 토요일이라 오전 6시경 일어나 등산을 하고 식당으로 나와 낙지 요리 소스를 만드는 작업을 막 마쳤다고 했다. 그와 부인 둘만이 남천낙지 맛의 소스를 만들 줄 안다는 것이다. 일주일마다 한번씩 만든다고 했다.

그의 부인은 2개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망미동(토곡) 대로변에서 2층 1백여평의 건물에 종업원 10명으로 ‘남천낙지’집을 운영하고, 재송동에서 2층 약 3백평의 건물에 종업원 50명으로 ‘태백산숯불갈비’ 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식당이라기보다 두 개의 기업이었다.

아무리 부인이 운영한다고 하더라도, 김소장이 도와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바쁜 사람이라고 ‘25시’ 라고 부른다는 것. 공직자로의 업무도 남다른 능력으로 수행하여 대통령표창을 세 번이나 받고, 임업직으로서 부산시 최고위직에 오른 그이지만, 실상 이건 약과다.
부산시로 전출을 간 이듬해인 84년 그의 부인은 고향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일부는 빌린돈 4억원으로 동업자와 상가건물을 지어 분양 2년 반 만에 12억원으로 증식시켰다. 이후 신만덕제일종합상가, 화명시장 상가, 덕포종합철물상가, 금곡동 제일시장 상가 등을 분양하여 모두 성공하였다.

90년초에 모교인 울진중·고 8/15 동창회에 참석했다가 김진복교장의 얘기를 듣고, 사비를 들여 시청각 교실 교육용 자재를 마련해 줄 만큼 경제적인 능력이 있었다.

그 후 김해시 내동에 한마음빌딩을 지어 분양하기 위해 그동안 번 돈 거의 전액을 쏟아 부었다. 약 100억원이 투입되는 사업이었다. 그런데 97년 IMF를 맞았고, 수십억 재산을 한 참에 모두 날려 버렸다. 남은 재산이라곤 약간의 땅과 27억원의 빚뿐이었다.

그에게 좌절이란 없다. 언제나 바쁘고 힘이 넘치는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99년 부산에서 가장 맛있다고 소문 난 낙지요리사를 설득하여 현재의 ‘남천낙지’ 식당과 용호동에 약 1백50여평의 규모의 갈비집을 동업하게 되었고, 낙지집도 갈비집도 장사가 잘 되어 재기의 기틀을 마련했다.

부산시 유력이사들, 중앙무대 유명 연예인들 모두가 맛으로 소문이 난 남천낙지 집을 다녀갔고, 매스컴에 뜨기 시작, 년중 10만여명, 지금까지 약 1백만명의 손님이 다녀갔다. 5년 후 독립하면서 요리사는 갈비집을, 김소장은 낙지식당을 맡았다.

그런데 요리사는 1억원 5천만원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 낙지요리 소스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댓가였다. 요리사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소장은 알지 않느냐고. 이 식당을 차려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가! 하여 흔쾌히 응낙했다고 한다. 그가 완전히 재기 하는데 7·8년의 시간이면 족했다.

오래전에 음해를 받은 적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주변 지인들로 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 일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는 유능한 공무원인 것을 직접 확인하고는 오히려 격려를 했다.

차라리 그때 그가 공무원을 그만 두었더라면 그는 아마 전국적인 대사업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지는 안았을까...  작지만 작지 않은 사람, 배보다 배짱이 더 큰 사람, 사업 아이템과 순간적인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 일의 추진력이 탱크보다 강한 사람, 그가 김선일이었다.

그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다. 신돌석의병장의 중군장 치언 김용욱 장군(별명 노랑장군)이 그의 친할아버지시다. 그의 아버지는 김제동 산림공무원으로 정년퇴임했다. 할아버지의 기상이 손자에게 유전되었을까. 아니면 할아버지의 음덕이 그를 원호하고 계신걸까. 김선일 그는 결코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 안정권 부산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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