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 산하 민족정기선양센터 자료/

            울진출신 71인 독립유공자 명단           2007년 6월 3일 현재

   
   
   
   
   
   
   

<독립장> 3인: 손창준 / 주병웅/ 최해


<애국장> 30인
: 곽무/ 김용욱/ 남복이/ 남석순/ 남원수/ 남지학/ 남태영/ 노하순/ 박문술/ 박춘근/ 백수영/ 윤대규/ 윤두현/ 윤종수/ 이두연/ 장세용/ 장세전/ 장영준/ 전만수/ 전병찬/ 전영경/ 전원강/  전인학/ 전세호/ 전재호/ 주영석/ 주진수/ 주진욱/ 최동인/ 최황순

  <애족장> 16인 : 김병두/ 남왈기/ 남용식/ 안천수/ 이윤명/ 임도식/ 임시헌/ 장봉숙/ 장영인/ 전배근/ 주유만/ 최경호/ 최재소/ 최효대/ 한영육/ 황만영
<건국포장> 1인: 이화익

<대통령표창> 21인
: 김기영/ 김봉문/ 김일수/ 김재수/ 남광호/ 남병표/ 남재량/ 박양래/ 배희직/ 윤강규/ 윤병관/ 윤상흥/ 윤학규/ 이목익/ 장형관/ 장호명/ 전병겸/ 전병항/ 최중모/ 최효대/ 홍우현

 

* 독립유공 훈격별 순위는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 순임.

 

손창준(孫昌俊)의 공훈록, 독립장(63)

울진(蔚珍)에서 출생하여 만주로 이주,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도구(三道溝) 대사탄(大沙灘)에 거주하였던 그는,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27결사대에 가입하여 동년 3월 3일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일을 계기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또 을사조약과 경술국치(庚戌國恥)에 서명한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조중응(趙重應)·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윤덕영(尹德永)·이병무(李秉武)등 세칭 오적(五賊)·칠적(七賊)을 암살코자 결심하고, 이 탁(李鐸)·안경식(安景植)·박진태(朴鎭台) 외 수명의 동지들과 서울에 들어와서 국장일에 거사키로 하였다.
그러나 권총의 입수가 늦어 3월 3일에 실행하지 못하고, 동월 15일 이 탁으로부터 권총과 탄환을 받아 다시 기회를 노리다가 운동자금을 모금하고자, 동월 31일 밤 차병제(車秉濟)와 함께 효자동(孝子洞) 김중환(金重煥) 집에 가서 자금을 요청하였으나 돈이 없어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월 4월 5일 차병제와 같이 무교동(武橋洞) 박홍일(朴弘鎰) 집에 들어가서 5백원을 받았으며 동월 29일에는 차병제·박기한(朴基寒)·이기원(李基源) 등과 인사동 한봉취(韓鳳翠) 집에 가서 120원을 모금하였다.
그리하여 목적한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였으나 경계가 삼엄하여 기회를 얻지 못하던 중 5월 5일 일경에 피체되어 모진 악형을 당하고 동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여년의 연도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주병웅(朱秉雄)의 공훈록, 독립장(63)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만주 봉천성 유하현 제이구 오도구(滿洲 奉天省 柳河縣 第二溝 五道溝)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을 하며 활약하였던 그는, 1919년 만주에서 이 탁(李鐸)이 주도가 되어 결성된 27결사대에 참여하여 손창준과 함께 을사 오·칠적 암살에 참여했다.
1919년 5월 5일 그와 결사대 대원 일부는 일경의 삼엄한 경비망에 뜻한 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말았다. 그는 1920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1921년 3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장이 자신을 강도라고 하는 것에 대해, "내가 목적하든 바 국가의 공적(公賊)을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의 불충(不忠)이라고 그 죄명으로 중죄(重罪)를 준다면 8년이 아니라 80년의 징역을 받는다고 해도 원한이 없다"라고 하여 자신의 거사에 대한 명분이 매국노를 처단함에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결국 징역 8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4년만에 옥중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해(崔海, 崔海日)의 공훈록, 독립장(77)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1915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9년 8월에는 서 일(徐一), 김좌진(金佐鎭)·계 화(桂和) 등과 함께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서남쪽 무송현(撫松縣)에서 대종교 간부들과 1919년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서 일(徐一)·김좌진(金佐鎭)·이장녕(李章寧) 등과 함께 군정부의 명칭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 개칭하고, 동사관학교 교관 및 여단장에 임명되어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연대장 정 훈(鄭勳),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무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청산리독립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거두었다.
1923년 5월에는 연길현 명월구(延吉縣明月溝)에서 김규식·고 평(高平)·이범석·최준형(崔俊亨)·허승완(許承完)·정 통(鄭通)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 김규식(金奎植)을 보좌하여 부관으로서 활약하였다.
일제가 만주를 석권한 1931년 이후에는 길림성(吉林省) 등지에서 대종교(大倧敎)를 시교하며 재만 한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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