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제조`유통 전념 년간 매출 2백억원 전국2위 규모
서면 삼근2리 새점 출신, 혁신과 창조적 아이디어의 신화

   
 도시로 가야한다. 시골에서는 꿈을 이룰 수는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고 거기서 군대 가기전의 청춘을 보냈습니다. 공장에도 다녀 보고, 여러 가지 직업도 가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항상 남의 밑에서 뼈 빠지게 일해봐야 희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능력을 맘껏 펼쳐볼 수 있는 독창적이고, 가능성이 큰 일을 해보기 위해 한발이라도 나아가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남다른 도전의욕은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고, 젊은 날은 고뇌와 방황으로 떠돌기만 했습니다. 병역을 마친후 부산으로 내려 갔습니다. 나 자신에게 딱 맞는 일은 없을까를 기대하면서.

부산 출신의 친구와 약 3년간 호텔에 칫솔과 치약, 1회용 비누와 면도기 세트의 납품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대로 장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내화 납품이 골치 아팠습니다. 당시 호텔측에서는 공장에서 제때에 납기를 지켜주지 않는 실내화 납품 책임도 함께 맡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하도 애를 먹이기에 “내가 실내화를 직접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까지 평생의 업이 되었고, 그로 인해 성공의 문턱에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당시 동래구 금사동에 세들어 사는 집 옥상에다가 아예 천막을 두르고 공장을 차렸습니다. 기술자와 단둘이서. 호텔, 시장, 병원 등에 납품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술자는 월급을 타는 날 이후에는 며칠간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아예 기술을 익혀 버렸습니다. 타고난 창의성과 도전정신은 ‘털 실내화’ 를 고안했고 대박을 터 뜨렸습니다. 만들기가 바쁘게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실내화 상인들은 ‘선업(SUN UP)’의 제품이 나오기 전에는 구매를 하지 않고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3~4명의 직원수는 점차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제품의 품질이 좋고, 주문처에는 납기를 제때에 맞추어 주니 없어서 못 팔았습니다. 이때 '선업'의 이름은 부산지역 실내화업계 명성을 얻었습니다.

공장을 차린지 약 1년이 지났을까. 88년 경 행운의 여신은 실존했습니다. 일본에서 교포 신발 에이전트가 서울, 부산, 대구의 각 1개 업체를 선정하여 다다미(일본 실내화) 1백만 컬레(약 1백억원어치의 물량) 씩의 오다를 주었습니다.

서울과 대구의 업체는 납기와 품질을 맞추지 못해 수출이 중단되고 말았으나, 선업은 모든 것이 순탄했습니다. 큰 공장을 얻었고, 직원 4백여명이 밤낮으로 일해 6개월을 하루에 한 컨테이너씩 납품을 완료하고 나니, 완전히 견실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의 성공의 발판은 기적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94년도에 말표 신발 태화고무에 콘테이너 11대(5톤 트럭 24대) 분량의 신발을 납품하고 부도를 맞았다.

지금은 경남 김해시 상동면 매리 부산~대구간 고속도로 상동톨게이트 인근에서 사업체를 옮겼다. 서울사무소와 1공장, 2공장, 중국 산동성 공장을 가지고 있다. 전국 대도시에 20여개의 선업 대리점이 생겼다.

그의 제2의 도약은 중국공장에서 이루어졌다. 또 한 번 그의 창의성의 발휘였다. 기존의 신발은 신발창과 천부분이 접착제로 붙여져 떨어지기 쉬웠다. 그런데 박사장은 사출접합방식을 개발하여 신발창이 벌어지지 않는 신발을 개발했던 것이다.

현재 선업의 제품들은 중국공장에서 30%의 물량을, 국내 아웃소싱으로 30%, 외국 OEM 방식으로 약 40%가 수입되고, 국내 공장에서는 일부 실내화만 소량 생산하고 있다.

이제는 신발 생산보다는 신발 유통업체로 거듭나고 있다. 년간매출 규모 2백억원. 신발업계 국내 매출규모 2위의 자리에 올랐다. 선업에서 취급하는 신발 종류만도 120여종이다. 구두와 골프화를 빼고는 모든 신발에 선업의 메이커가 붙었다. 중국공장까지 합치면 직원 수만 약 6백여명이고, 자산규모도 1백억원에 달한다.

국내 유명 유통업체 매장에는 선업의 제품들이 진열된다. 롯데마트, 홈플러스, 서원유통( 탑마트), 하나로마트 등 전국 유명업체들을 망라한다. 롯데 1곳에만 년간 60~80억원어치가 납품된다.

그의 이러한 성공이 알려진 것은 재부 서면면민회를 통해서다. 그동안 사업에만 몰두하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지난해 서면면민회가 창립되면서 박사장은 초대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고향과 고향사람들을 위해 재부서면면민회가 정착하도록 헌신과 봉사를 다할 각오를 내보였다.

그는 서면 면서기를 했던 故 박사준씨의 7남매 중 장남으로 새점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먹고 살기 힘들어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할 무렵 아버지를 따라 봉화 물야로 이사를 했다.

봉화에서 중`고 과정을 다 마치지 못하고, 더 어려워져 다시 고향마을 가까운 심산유곡 광회리 갈마제로 회귀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젊은날 그는 한때 희망도 없는 암담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독학으로 실력을 쌓아가면서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대비했다. 결국 굳센 삶의 의지가 오늘의 그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고향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중이다. 특히 서면을 위해 36번국도가 뚫리면, 국도에 인접하여 큰 부지를 마련하여 고향특산물 판매장을 만들어 볼까도 생각했다.

여기에 자릿세를 받지 않고 고향 사람이면 누구나, 금강송 공예품, 시골된장, 산나물 등 고향의 특산물을 팔아 주민들이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그런 대형 국도변 장마당을. 아무튼 그는 고향을 잊지 않고, 고향사람들을 잊지 않고 있는 울진사람, 새점 사람임을 확인했다.

그를 보면서 운명은 역시 때를 기다리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구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프론티어정신을 끊임없이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전병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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