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장 따라 사라! 부산 바닷고기 유통업계 대부

평해 거일 출신 자갈치
공동어시장 31년 지킴이

 

울진신문은 16년 전 창간 때부터 <출향인> 이라는 특집란을 꾸며 왔다. 그동안 수많은 울진 출신 사람들의 성공과 좌절을 그려 냈다.

그들이 어떤 과정과 노력을 통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을 기사화 하는 것은 울진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가의 비결을 가르쳐 주는 작업이다.

결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출향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에는 남다른 눈물과 역경이 있었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한편의 파란만장한 드라마이며, 주인공들에 대한 생생한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안타까울 일이다.

<출향인> 란의 새로운 인터뷰 대상자들을 만날 때마다 새삼 감동하고 울진사람으로서의 자부심마저 일어난다. 성공의 대소를 떠나 우리가 어떤 각오로 이 험난한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하는 가에 대한 지혜를 얻는다. 편집자 주.

 

    이번에 인터뷰를 하게 된 윤성룡(56세) 해창유통 대표. 그가 고기 유통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대단한 인물이기에 존경한다. 그러나 그의 성공의 크기 보다 어떻게 여러 대기업에서 마저 손을 댔다가 모두가 철수한 고기 유통업계에서 31년간을 업계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서의 위치를 누려 올 수 있었던가 하는 것에 대해 더욱 존경한다.

특히 부산은 우리나라 바닷고기 유통의 가장 큰 시장이다. 규모가 크다보니 삼성, 현대, 대우, 두산, 골든벨 같은 대기업들이 진출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문적인 바다와 고기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적자에 시달리다 결국 손을 떼고 말았다.

그가 하는 일을 간단히 설명하면 국내산, 원양산, 수입산 바닷고기를 구매 비축하여 적절한 시기에 전국 도매상들에게 공급하는 사업이다. 오징어, 고등어, 칼치, 꽁치 등 주로 대중적인 어종 10여 종을 취급한다.

12~3년 전 그는 연간 최고 매출 4~5백억원을 올려 전국 동업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가 한창 사업을 확장할 때는 부평에 있는 ‘연우냉동’에 1일 20톤 트럭 10대분의 고기를 매일 올려 보냈다.

31년간 거의 실패를 모르고 사업을 해온 그의 경제력의 규모를 아는 사람은 없다. 결코 생활이 화려하거나 자신의 재력을 자랑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돈을 쓸 때와 아낄 때를 안다. 모교인 후포고 도서관을 설치 하는데 3천만원의 거금을 쾌척한 적도 있다.

대형할인마트, 식자재 공급업체가 생기고, 인터넷으로 중간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들과의 거래가 활발히 일어나는 지금은 예전의 거래량보다 많이 줄었다. 그러나 지금도 연간 매출 2백억원대를 웃도는 거상이다.

한 때 우리나라 최고 많은 물량이 거래되는 부산공동어시장 유통업자들 사이에는 “해창 윤사장을 따라 사야한다” 는 말이 회자됐다. 그가 손을 대는 고기는 값이 뛰었다. 그는 부산 어시장에서의 큰손이자, 부산공동어시장을 31년간 지켜온 지킴이였다.

현재 부산공동어시장에는 유통상인들이 예전의 60여명에서 1백여명으로 숫자는 불어났다. 그러나 윤사장처럼 31년간을 성공하면서 버틴 사람은 없다. 대개는 실패하고, 간혹 돈을 번 사람들은 업계를 떠났다.

부산의 동종업계에서는 고기장사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해창의 윤사장을 먼저 만나보라고 한다.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는 “하지 말라”고 권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숱한 사람들이 망해 나가는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제 어떤 고기가 많이 잡힐 지, 또 어떤 고기를 언제 얼마 만큼 수입해야 될런지, 예측해 내기란 힘들다. 시세가 조금만 변동해도 큰 손해를 볼 수 있고, 언제 바닥을 볼런지도 모를 투기성이 매우 높은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윤사장은 거의 실패없이 31년간 일을 해왔다. 그는 지금까지 하루에 2~3번 어김없이 어판장을 돌고, 수산물저장 창고를 돈다. 중학시절 어느 신문에서 보았다는 “뛰면서 생각하라!” 를 명심보감처럼 가슴에 새기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고있다.

누가 어떤 고기를 사서 얼마를 비축해 두고 있는 지, 판장에서의 시세는 어떻게 변동되고 있으며, 어떤 고기들이 잡혀 들어오고 있는 지, 직접 일일이 메모하며, 시장 상황을 체크했다. 부지런하고 철저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또 매스컴에도 눈을 떼지 않고 어느 나라에서 어떤 고기 얼마를 언제쯤 수입해 들여 올 것인지를 비롯해서 세계 어시장 동향도 면밀히 파악했다. 지금도 직원 6~7명을 채용하고 있지만, 이를 토대로 어떤 어종을 얼마나 언제 구입할 것인지, 언제 얼마나 출고 할 것인지는 직접 결정한다.

그는 자신이 취급하는 어종들의 산지 외국 현장을 모두 다녀왔다. 현장을 아는 것이 그의 사업 성공의 비결이다. 그는 오징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잡히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직접 오징어를 잡아 보았고, 말려 보았다. 그의 사업은 장사(유통)는 기본이고, 고기를 알고, 바다를 알아야 하는 사업이었다.

그는 평해 거일리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고깃배 사업을 하여 어릴 때부터 배위에서 놀았고, 군대를 제대하고,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울릉도에 가 배위에서 생활한 적도 있다.

지금까지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 옛말에 “좁쌀 석 되만 있으면 하지 말라” 던 머구리에 공기를 넣어주는 펌프질이었다. 취직할 때는 없고 가정은 어려워 바다 일은 안 해 본 것이 없다. 그는 시쳇말로 바다 일에 대해서는 빠삭했다.

어린시절 그의 아버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데도 불쑥 “배 들어온다” 라며 문을 열었다.거짓말 처럼 아버지의 배는 귀항하고 있었다. 자신의 배 엔진소리를 구별해 낼만큼의 예민한 감각을 지니신 분이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 그래서 고기를 사고 팔 줄은 알지만, 바다와 고기를 모르는 부산의 상인들에 비해 자신감이 있었다. 그가 다른 상인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성장과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도 바다와 고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군대를 제대한 이듬해인 75년도 25살 때, 부산공동어시장의 고기 중매상에 취직을 했다. 몇 개월 동안 월급 5천원을 받는 총무직 이었다. 말이 취직이지 처음에는 먹이고 재워주는 것이 전부나 마찬가지였고, 나중에는 최고 월급 3만5천원을 받았지만 박봉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한 지 3년이 되었을 때, 회사는 부도가 났다. 앞날이 막막했다. 공동어시장에서 상인들의 고기를 지켜주며 끼니를 해결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고기를 사고, 파는 방법을 배웠다.

그동안의 거래처를 통해 중개를 하기 시작해 ‘신영상사“라는 회사를 차렸다. 운이 좋을 때는 한번에 월급 3만5천원의 일년치의 수입이 들어왔다. 그러나 3년 뒤 그의 인생에 첫 좌절을 맛 보았다. 일본에서 수입했던 빨간고기(아까돔)의 판매가 안돼 약 8백만원이라는 거금의 손실을 보았다.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던 고기에 대한 지식, 그러나 빨간고기에 대한 지식과 경험의 부족이었다. 구입하여 냉동창고에 저장했던 고기들의 색깔이 허여멀건하게 변하기 시작했고 소비자들은 외면했다. 빨간고기의 실패는 나중에 윤사장의 사업에 큰 자산이 되었다. 이 실패가 향후 그의 인생에 큰 교훈을 주었고, 오늘날의 윤사장을 만들어 낸 정신적 수호신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단추공장을 하는 친구에게 피신했다. 일년동안 정말 열심히 친구의 회사 영업을 하였으나, 단한건의 실적도 내지 못했다. 부산 어시장에서 지금의 노력 절반만 기우려도 그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고향에 내려오니 가족들은 여전히 어려웠다. 어머니는 마지막 힘인 석돈짜리 금반지를 빼주셨다. 다시 부산 어시장을 찾아 당시 8백만원 보증을 서 주었던 분을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그 분은 반갑게 맞으며, 장사를 할 수 있도록 오히려 밀어주었다. 일년만에 빚을 다 갚았다.

그가 부산에 첫 발을 들여 놓은 8년 뒤인 83년, 그를 오늘날의 부산어시장에서 동업계 대부격으로 성장시킨 해창물산을 설립했다. 바다와 고기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이후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약 20년전부터 현재까지 그는 원양참치 조업 전문업체인 ‘사조산업’에 미끼를 공급하고 있다. 그동안 사조산업은 참치 낚시 미끼인 고등어와 오징어를 일본에서 구입해 사용하고 있었다. 해창의 정성과 품질은 최고 연간 약 60억원어치의 고등어 50만상자와 오징어 20만상자를 납품하여 안정적인 성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래처의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가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한가를 알 수 있을 때, 그것은 자신의 사업 자산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정보를 제공하여야 하는데, 거래처 사조산업 부회장과는 지금도 자주만나 시간을 함께 한다고.

그의 어린시절의 기억은 “달리기”였다. 중3때 육상을 시작하면서부터 거일마을에서~학교까지 5킬로미터를 매일 왕복으로 뛰어다녔다. 육상 선수가 꿈이었고, 밥만 먹으면 뛰었다. 8백미터가 주종이었다.

고교때 경북대표선수로 전국체전에 출전했다. 그러나 행사측의 갑작스런 사정으로 1,500미터를 달리게 되어 입상을 하지 못했다. 그때 8백미터에서 입상했더라면 그의 인생행로가 바뀌었을 것이다.

또 고교시절 아버지의 별세로 가정이 어려워지자, 해병대에 지원해 돈을 벌기 위해 월남 파병을 노렸다. 그러나 훈련을 마치고 났을땐 파병했던 장병들의 철수가 결정됐다. 또 한번 본의 아니게 인생행로를 수정했다.

고교시절 코치도 없던 학교 육상부를 그가 이끌어 갔다. 후배들을 데리고 자발적으로 운동장의 돌을 캐어 리어카로 실어내면서, 돈을 벌면 자신이 학교 운동장에 고운 흙을 넣어 주겠다는 가상한 결심을 했던 학생 ‘체육부장’ 출신으로 모범생이었다. 그것이 나중에 도서관 설치비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어 내심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29살에 결혼하여 두 남매를 두었고 밝고 건강하게 자란 이들과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는 초대 평해 읍민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5년째 재부 후포중고등학교 동창회장직을 맡아 수백명이 참가하는 동창회로 활성화 시켰다. 그는 재부 울진군민회 부회장으로서 차기 회장 내정자이다. “나의 인생에 있어 고향을 위한 마지막 봉사가 될 것입니다.” 부산에 살고 있는 고향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갖도록 최선을 다할 작정이라고 했다.

그의 피서는 매년 맏형이 지키고 있는 고향에서 보낸다. 고향마을 앞바다의 물속처럼 편안하고 시원한 곳은 없다고 한다.               / 안정권 부산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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