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남도국 미공군 제8전투비행단사령부 공보관

겨우 중학을 마치고 농사 짓다 카투사로 군역을 마치다
대학 영어전공자들도 어렵다는 주한미군 안전관에 채용 돼

  금회부터 前 남도국(70세) 군산 주둔 미공군 제8전투비행단사령부 공보관의 삶의 이야기를 10회 정도로 나누어 싣는다.

  그는 일제치하 울진이라는 시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겨우 중학교를 마치고, 울진고등학교 가짜 졸업장으로 대학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운 좋게도 카투사에 들어가 군역을 마쳤다.

  그러나 깡다구 하나로 버티며 무던히 노력하여 결국에는 4년제 대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한 이들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당시의 주한미군 안전관 시험에 당당히 합격 미군 문관이 되어 퇴임시에는 군산 주둔 미공군 제8전투비행단사령부 공보관이었다.

  텃세가 세다는 전라도에서 그의 영어실력과 업무능력으로 2천여명의 문관중 최고직급에 올라 재직기간 동안 세계 각지의 안전전문가들과 교류하며, 후기 10여년 동안은 공보관으로서 경륜을 쌓아가는 생생한 체험과정이 독자 여러분들에게 흥미진진하면서도 많은 인생교훈을 간접 경험케 해 줄 것이라 믿는다.  
                                                                             편집자 주.


 

군산 미공군 제8전투비행단 사령부 공보관 (Public Affairs Officer, 8th Fighter Wing, Kunsan Air Base, US Air Force)이 퇴직 전 나의 공식 직함이다.  그 이름이 그리 요란하고 복잡하듯 내 인생 또한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리라. 

나는 근남면 뒷들 100여 호 사는 조그마한 동네 가난한 농부의 6형제 7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몹시도 가난했든 왜정 말기에 태어나, 먹을 것 입을 것 모두 일본 정부에서 전쟁 준비에 사용하기 위하여 강제로 다 거두어 가고, 우리는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며 배가 고파 칡뿌리, 쑥, 나무껍질 등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고생스럽게 살아왔다.

일본식 초등학교에 겨우 입학은 했으나, 이름조차 일본말로 개명하여 사용하면서 위반하면 벌을 받는 등 모든 것이 일본식이었다. 그런 중에서도 나는 책을 좋아해 농사일 밖에 모르는 아버지의 눈치를 봐 가며 틈만 나면 좋은 책인지 해로운 것인지도 모르고 덮어 놓고 책이라면 다 욕심내어 읽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혼도 많이 당했다.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1950년 6. 25 동란 때에 나는 또 중학교에 입학하여 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글도 영어도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기초도 없이 노음초등학교와 울진중학교를 이름만으로 졸업을 해야 했다.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논 10마지기 농사일하는 아버지에 힘을 보탰다. 위로 다섯 형님들은 모두 군에 가서 전투에 참여하였고, 아직 나이 어린 나는 아버지를 도와 한 3년 시골집을 지켰다.

나 같은 부족하고 모자란 시골뜨기 촌 청년에게도 때는 오는가? 1957년 4월, 겨우내 얼어붙었든 땅 위에 초록 생명이 힘차게 박차 솟아나며 동백과 진달래 꽃 만발하던 늦은 봄 어느 날, 셋째 형님께서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참여했다가 임무를 마치고, 현지 전북 군산경찰서에 첫 발령 받아 나를 그 곳에 와 공부를 계속해 보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때를 놓치지 않으려 서둘러 옹기종기 시골 보따리 싸들고 울진에서 새벽 5시 첫 버스로 덜커덕 거리며 대구까지 가서, 짐짝처럼 많은 사람들을 싫은 완행열차로 대전까지, 대전에서 또 호남선 완행열차로 익산(이리)까지, 익산서 또 역시 완행열차로 군산까지 도착하니 밤 10시경에 도착, 무려 17시간이나 걸린 오랜 첫 여행에 지쳐 퍼져버렸다. 

그때는 참 어두운 시절이었다. 당시 막 문을 연 원광대학교는 등록금만 납입하면 입학을 시켜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금에야 실토할 수 있지만, 중학교도 겨우 마친 나는 감히 용기를 내어 울진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졸업증명서를 만들어 제출했다.

겨우 들어가긴 했으나, 3개월여 다녀보니 도저히 차비와 경비를 감당할 수 없어 포기하고, 군산 시립도서관에서 독학하기로 결심했다. 일년여 열심히 했지만 뚜렷하게 가시적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고민하든 차, 병무청에서 군 입대하라는 연락이 왔다. 
차라리 언젠가는 꼭 가야할 군복무를 마치고 보자는 마음으로 군에 입대하기로 결심,  1959년 3월 아직 무논에 얼음이 채 녹기도 전 추운 초봄에 나는 논산훈련소 제26연대에 들어가 군사 훈련을 받으니 남들은 힘들다 아우성쳤지만, 농사일에 고생하든 나로서는 그 까짓 군사 기초훈련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금마 포병훈련 2주까지 모두 6주 훈련을 다 마치고 첫 발령 받은 것이 내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디딤돌이 될 카투사, 주한 미육군 제7보병사단 항공대였다.

난생 처음 만져보는 질좋은 미제 보급물품이 엄청 많아 커다란 휠드백에 가득했다. 기쁜 마음으로 사단에서 보내온 트럭에 실려 경기도 동두천 생연리에 위치한 항공대에 도착했다.
처음 먹어보는 양식이 입에 맞지 않아 나 자신과 싸우며 적응하는데 한달이나 걸렸고, 알아듣지 못할 영어, 침대생활, 군기, 취침, 오락, 각종 모임, 사생활, 빨래 등 모두 생소하고 힘들었지만, 무던히도 잘 참고 견뎌냈다.

모든 훈련과 생활을 말썽없이 잘따라 하니 미군들 눈에 들어 이것 저것 더 많은 것들을 다정하게 가르쳐 준다. 나는 집이 멀고 서울 근처에 가까운 친척도 없고 또 돈도 없어 주말에 외출도 하지 못하고, 부대에 남아 미군들과 어울려 영화보고 독서하고 당구 게임하고 했더니 미군들의 생활영어가 나의 동료들 보다 빨리 귀에 들리기 시작한다. 

배속 받은 지 6개월 만에 대대 본부 서무계로 발령나고 영문 타자도 열심히 연습하여 잘 때리니 대대 서무계 주임으로 승진했다. 군생활 일년여만에 생활영어 정도는 익숙해 졌다. 그 곳에서 61년 11월 육군하사로 만기 제대할 때까지 미군들과 친구하며 열심히 또 재미있게 군생활을 하였다. 

때 마침 형님으로부터 대우가 아주 좋은 군산 비행장에서 영어 잘하는 젊은 경비원을 모집 한다는 통보를 받고, 나는 곧 바로 달려가 응시한 결과 필기 및 면접시험 모두 합격하여 20 대1의 경쟁을 물리치고 기쁨으로 미공군 군산 비행장 헌병대 군견 경비원으로 취업하게 된다.

미 공군부대이며 외곽 경비를 하는 한국인에게 까다로운 신원조회를 받아야 업무를 맡기는 규정에 따라 한국경찰에 신원조회를 의뢰하여 일년여에 걸쳐 이 신원 조회가 진행된다. 이 기간 나는 군산 비행장의 건설현장에서 막 노동과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취업과 장래를 설계하고 준비하였다. 

1963년 3월 군산비행장 인사과에서 신원조회 결과 이상없어 비행장 외곽지역을 경비하는 군견대원으로 채용됐다는 통보를 받았으며, 또 다른 까다로운 신체검사를 거쳐 근무지 배치를 받아 일하게 된다. GS-05급, 미국방성 소속 문관신분으로 미국정부에서 지급하는 급료를 받게 된다. 

월 기초근무 160시간에 야간 근무수당 포함 240 시간의 급료를 지급받게 됨으로 당시 월급 약 60,000환 정도로 한국에서 대우가 좋다는 한전 영등포 지점에 근무하는 형님의 급료 보다 훨씬 웃도는 월급을 받으며 나의 공직 생활은 시작되었다.

나무 한그루 없는 활주로 외곽의 허허 벌판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야간에 하루 8시간, 잘 훈련된 군견과 벗하며 단 둘이 서해안의 최첨단 군산 해변에서 모진 기후 환경, 바람, 폭풍, 엄청난 눈과 싸우며 젊은 투지를 국가 안보에 기꺼이 바친다는 각오로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 왔다. 

1967년 5월, 인사과에서 사령부 안전관, GS-9급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접하고 나도 감히 한번 응시하기로 결심하고 2주간 열심히 준비하였다. 나는 정말 주한미군과 깊은 인연이 있는 것인가? 그 방면에 체질로 타고 났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것일까?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 보고 그렇다고 말한다. 

나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찌 그리도 높은 9급 안전관 직책에 감히 도전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물론 주위의 사람들이 안될 일을 뭣 때문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느냐고 만류했지만 결과는, 학벌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미군에서는 언어소통에 확실하고 그간의 근무성적이 우수한 나를 서울서 영문을 전공한 4년대학 나온 사람을 물리치고 선택하여 주었다. 

GS-9급, 명실 공히 군산 비행장에서는 5명밖에 없는 최고위직으로 월급료도 최고봉으로 많았으며, 미국정부 소속 군무원으로 자부심도 대단하여 여러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고, 또 지위가 높아지니 어여쁜 신부감도 소개해 주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남도국 前 미공군 제8전투비행단사령부 공보관 약력

경상북도 명예 관광통역 안내원, (전) 주한 미공군사령부 공보관/
1937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501번지에서 출생/ 1953년 울진중학교 졸업/

1961년 미육군 제7보병사단에서 육군하사로 제대/ 1962년 미공군 군산비행장 헌병대 문관으로 취업, 1967년 안전관, 1990년 공보관/ 1970년 주한 미대사관 한국어 통`번역관 등록/ 1970년~1973년 (사단법인) 한국 해외개발공사 군산지사장/

1990년~2000년 기간 미공군참모총장, 미태평양 공군사령관, 주한 미군사령관, 미공군 군산비행장사령관 상 등 다수 수상/ 1995년~2000년 대한민국 문교부장관, 건설교통부장관, 노동부장관, 전라북도지사, 전라북도교육장 및 전라북도경찰청장 상 외 다수 기관 및 사기업체장 표창 및 감사장 수상/ 1996년 워싱턴 미국 국방부 펜타곤에서 미공군 최우수 공보관상 수상/

2000년 주한 미공군 전투비행사령부 공보관 정년퇴직/ 2001년~2007년 경상북도 명예 관광통역 안내원/ 2002년~2003년 울진군 근남면 구산1리 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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