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도국
  국제결혼 수속 대행업체 만들어 짭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 이장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님이 평소에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두분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근남면 수곡리 뒷산 한투골 중턱으로 이장을 했다. 

당시 풍수지리에 밝다는 어떤 분이 “동쪽으로 산을 몇 개나 넘어 동해바다가 환하게 보이는 이 자리는 후손이 많이 태어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모두 해외에 나가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다.

|풍수의 말이 헛말은 아니었는 지, 내가 주선하여 형님 두 분, 형수와 조카들 네 가족 모두 12식구를 미국으로 이주시켰다. 큰 형님과 형수는 고령으로 시카고에서 돌아가셨으며, 조카들은 현재 미국에서 남아 모두 일식당 및 한식당 등을 경영하며 잘 살고 있다. 

사령부 안전관으로 옮겨온 나는 부임한지 6개월만에 일본 요꼬다 미공군 기지로 2주간 출장을 가 안전업무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처음 해외로 나가 일본을 보고 배우고 듣고 깊이 알게 되었다.

또 4개월 후에는 필립핀 클락 미공군 기지 (지금은 화산재로 폐쇄 됨)에서 2주간 안전관리에 대하여 기초교육을 받았다. 또 그 다음 해 1969년 4월에는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시에 위치한 미공군 기술전문학교 안전기초과정 교육을 6주간 받고 돌아옴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안전전문가로 1호로 탄생했다. 

또 2년 후 1971년 5월 다시 콜로라도 덴버시의 미공군 기술전문학교에 들어가 그 어려운 미공군 안전장교 코스 10주간을 눈물과 땀으로 견뎌 금의환향하는 심정으로 수료증을 들고 귀국했다.         

그후 맡은 일 열심히 잘하며 각종 상부의 검열에서 인정을 받으니, 추가로 사령부 교통안전 문제도 맡게되어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시에 위치한 교통안전전문가 과정 4주교육을 또 수료한다. 그 후로는 명실공히 미공군에서 인증하는 안전전문가로서, 세계각국에서 개최되는 산업, 교통안전 세미나 워크숍에 참석했다.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것은 역시 미국 시카고에서 연례행사로 개최되는 NSC (National Safety Council) 회의에 문제해결 전문가로 5차례나  참석하여 성공사례를 발표하며, 세계적인 안전전문가, 교수들과 안전에 대한 미래 방향제시 등의 문제를 토의, 교환, 제안, 기획하며, 열심히 공부하든 것이리라.

1971년 4월 4일부터 6월 18일까지 받은 미공군 안전장교 교육 과정이 그 동안 받은 각종 교육 중 제일 어렵고, 힘들었다고 기억된다. 학생이 총 13명, 모두 미 육·해·공군 및 해병대에서 차출돼 온 젊은 장교들인데 나만 한국인이며 민간인이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까지 하루 8시간씩 에누리없는 엄한 집중교육이었다. 매주 금요일 오후엔 시험을 치르는데 60점이하 점수를 두번 맞으면 소속 부대로 돌려보냈다. 졸업장도 못받고 돌아가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의 경우는 나라 망신까지 감수해야 할 판이다.

강사 이야기를 반절도 알아듣기가 힘든다. 끝나고 집에 가서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해야만 겨우 그날의 교제를 이해할 수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생활을 10주간 하다 보니 내 머리가 갈색으로 변해 오는 것이었다. 물론 외국인이며 나이 많은 민간인이고 하니 강사가 (현역 공군 대위) 개인적으로 잘 봐준 덕도 있어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그러나 주말엔 그룹으로 나누어 지역관광도 하며 젊은 시절을 나름대로 지구촌 사람들과 즐겁고 가치 있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나는 그토록 어렵게 경험한 해외 나들이를 통하여 많은 상식을 얻었다.

나는 지금도 간혹 미국으로 유학가는 학생을 만나면, 미국서 공부하는 게 쉽지 않으니 인생을 새로 시작한다는 각오로 태평양을 건너라고 당부한다.

1970년 봄 그 당시 많은 한국여성들이 미국 군인들과 국제결혼을 하였으나, 남편을 따라 미국 입국 수속을 밟는데, 어려움 정도가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었다. 나는 수차례 미국 입국과 교육, 여행을 통해 미국에 대해 많은 지식을 얻고 있었던 나는 그렇게 바쁜 중에도 서울에서 해외이주 업무만 담당하던 (사단법인 )해외개발공사를 찾았다.

군산시청 뒤 영화동 12번지에 군산지사를 설치하고, 정부에서 허가한 저렴한 가격을 받고 신속·정확하게 수속을 도와준다는 소문이 장안에까지 퍼졌고, 전라도는 서울, 대전, 경기도 지역에서 조차 도와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낮에는 본 직장에서 일하랴, 퇴근 후엔 물론 영어를 하는 직원 3명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밤늦게까지 서류를 만드느라 잠마져 설쳤다. 약 2년만에 무려 250건의 결혼수속과 여권 및 미국입국 비자 수속을 대행해 주었다.

해외개발공사 군산지사를 어렵사리 따 왔으나, 처음에는 사무실 임대료, 직원 3명 급료를 감당하기가 어려워 도중에 그만 포기할 까 생각도 했다. 한 주에 한두번 아침 비행기로 서울 가서 뛰고 달리면서, 서울 중구청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서울시청에 가 혼인증명서를 발급받은 후, 외무부에 여권발급 신청서를 접수한다. 

그 서류가 경찰청으로 넘겨져 까다롭고 시일이 길게는 두 달 짧게는 한 달이 소요되는 신원조회 결과 이상이 없으면 외무부로 통보되어 여권이 발급되게 된다. 그 후 미국대사관에 비자발급 신청서를 접수하고, 2주 혹은 3주 후에 비자를 받는다.

이렇게 까다롭고 많은 구비서류를 영문으로 작성하여 미국행 수속을 밟으려면 4-5 개월 걸리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주로 경찰의 신원조회 때문이었고, 구비서류가 잘못되거나 신원조회 결과 아가씨의 진술이 허위로 판명되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가는 안타까운 경우도 발생했다.

미군 신랑은 본국으로 귀대할 날이 가까워 오면 그녀와 동반하지 못할 까 봐 수속을 독촉해 달라고 앙달을 한다. 그러니 처음부터 아가씨의 진술을 꼼꼼하게 챙기고 분석하지 못해 나중에 원망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바짝 긴장해야 한다.

어떤 아가씨는 아예 호적이 없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여인은 실제 나이가 신랑보다 무려 20세나 위인 경우도 있었다. 그 호적으로는 도저히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나이가 신랑과 엇비슷한 다른 여자의 호적을 돈을 주고 사서 가짜 이름으로 수속을 했다. 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라, 한 사람이라도 부자나라 미국으로 이민가는 것은 효자 딸이요, 애국하든 시절이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여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나는 꽤나 명성도 얻었고 꽤 많은 돈도 벌었다. 당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그 여성들을 미국행을 성사시킴으로서 국가에 공헌을 하였다 하여 많은 기관과 사기업으로부터 표창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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