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서의 첫 고배 노조지부장 선거 낙선

                            前 남도국 공보관  

 미공군 군산비행장 헌병대 정문(Check Point)에서 함께 근무하든 형수님이 시내에 ‘미도파’ 라는 미장원도 개업하고 있었는데, 그기에 미용사로 근무하는 마음 좋고 성실한 아가씨를 남 주기 아깝다며 우리 사람으로 만들자고 했다.

형수님은 당시 내 위의 형님도 아직 미혼으로 군산에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 아가씨에게 형님이나 나 중 택일하도록 위임하니 아가씨 어리둥절 어떻게 처신할지 모르는 사이 내가 적극적으로 먼저 데이트를 요구했고, 열애 끝에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노력한 결과 본인에는 물론 양가 어른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직장 생활 몇년 하긴 했지만 총각으로 알뜰하게 결혼 자금 모은다는 것은 그 때 당시는 그의 불가능했다. 고향의 큰 형님이 부락 이장일을 맡아 하며 짊어진 빚 갚기를 두 차례나 하고 나니 조금 모아 놓았던 돈도 다 써 버렸다.

내 돈으로 겨우 전세 단칸 방 하나 얻고, 형님이 준비해 준 솜이불과 요, 그리고 대전 처가에서 장만해 준 철제 케비넷 하나로 신방을 꾸렸다. 1965년 9월 30일, 아직 더위도 지나가지 않은 늦여름에 우리는 군산경찰서장 주례로 예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생략하고 결혼 날 저녁에 나는 야간 경비 일을 하러 나갔다. 

미장원 미용사로 일하는 부인과 알뜰하게 한 2년 일하니 2층 주택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 모여졌다. 또 그 다음해에 형수님으로부터 미장원을 인수받아 부인이 직접 운영하니, 장소가 군산 시청 후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들끓었다.

또 미군들의 출입을 허가하는 외국인 전용 술집, 클럽, 바가 밀집한 영화동 지역인고로 그들을 상대로 하는 아가씨들, 달라 딜러들, 밀수 미제 물품 취급자들, 포주들, 또 시내 주요 인사 부인들, 군산을 찾아온 유명 가수 탈랜트 등등, 손님이 많아 끼니를 굶으며 돈을 벌었다. 

미용사 둘과 부엌에 식모를 두고, 열심히 일하니 나의 부인이 버는 돈은 그대로 저축하고 내가 번 돈으로 살림했다. 당시 가난하게 사는 울진의 형제, 자매, 조카, 질녀들 12명을 불러와 셋방 얻어 살게 하고, 군산비행장에 직장을 얻어 살림 나갈 때까지 뒷바라지 해 주었다.

그 때 우리 집 식구 보통 12명, 심지어 우리 부모님도 한번 오시면 1년 혹은 6개월 계시다 가셨다. 그래도 우리 집사람은 마치 그것이 자기의 당연히 해야 하는 도리인 양 형수님이 처음 소개할 때 처럼, ‘불평 한마디 없이’ 살림과 사업을 잘 맡아 처리해 주었다. 

나도 30대 후반인 그때, 해외 개발공사 군산지사를 개설하여 미용실 많은 손님을 단골로 확보하고 저렴한 수수료를 받고 열심히 신용 있게 그들의 결혼 수속을 도와주니, 아! 그 때는 세상에 부러운 것 하나 없는 듯 싶었다. 

군산시에서 제일 경기가 잘 돌아가는 영화동 번영회 총무에, 경북 경주출신의 군산 검찰청 지청장, 안동 출신의 경찰서 보안과장, 부산이 고향인 군산세무서장 등등 약 20 여명의 경상남북도 출신으로 모인 경군회(慶群會)를 조직하여 총무 일을 맡아보았다.

|매월 한차례 만나 고향의 정을 나누며 기죽지 않고 살았다. 간 크게 나는 또 형수님의 명의로 중앙로에 ‘만원 다방’을 개설하여 2년, 영화동에 ‘뉴욕 다방’을 또 2년 간 운영하며 사업장을 벌였다. 나의 마당발 외교(?)를 최대한 활용하며 군산의 누구도 함부로 무시하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기반을 닦으며 살았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돈과 명예는 그럭저럭 얻어졌지만, 나는 색시들과 미군이 버글거리는 유흥 장소 영화동에서 위로부터 딸만 계속 얻게 된다. 돈도 중요 하지만 아이들 교육상 도저히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 판단하고 75년 6월에 그토록 목 좋아 돈 잘 벌리는 미장원과 해외 개발공사를 다른 사람에게 인계해 주고, 나와 집사람은 삼학동 조금 떨어진 변두리에 45평짜리 2층 주택을 구입하여 들어와 살았다.

그 해 11월에 드디어 우리가 10년 넘도록 기도하든 아들 경문이가 태어났다. 이제는 세상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고 오직 직장 일에만 전념하고 집 사람은 그토록 염원하든 주부 생활로 접어들고, 그 간 장만한 2층 건물과 20평짜리 삼학 아파트를 전·월세로 내 주고 편안하고 평범한 생활을 살게 되었다. 

부대 노동조합에서 또 날 손짓했다. 한인 종업원들 살기 어려우니 퇴근 때에 너나 할 것 없이 미국 물건 훔쳐 나온다. 커피, 설탕, 담배, 양주, 의류, 전자 제품, 돼지 및 쇠고기 육 등 가져 나올 것 너무나 많다. 

당시 우리 한국은 가난하고 어려워 미제 물건이면 밖에 나와 몇 배나 비싼 값에 팔리기 때문에 누구나 그냥 나오는 사람 없고 몸에나 옷 속에 감춰 나오다 정문에서 (Check Point)에서 발각되어 해고되거나 인사 조치 당 하는 예가 많이 있었다.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아직 초기이고 노사회의의 언어소통이 잘 안되어 한번 걸리면 여지없이 미군들의 뜻대로 쫓겨 나가 놀아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였다. 나는 9급 안전관으로 관리직에 속해 규칙상 노조 회원이 될 수 없었다. 조합에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미군측에 나를 예외 노조회원으로 가입시켜 줄 것을 건의했다.

미군측에서 노사 화합과 지역민과의 유대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나를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노사회의에 참석하여도 좋다는 허가를 해 주었다. 그 해에 조직부장 일을 맡는다.  한해가 지나니 나를 노사회의에 참석시키려고 부회장에 선출시켰다. 

별로 다른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내가 노사회의에만 들어가면 전에 비하여 짧은 시간에 문제가 합리적으로 척척 해결되니 조합도 사측도 만족하고 7~8년간 노사가 큰 문제없이 잘 풀려 나갔다. 

인기가 상승하여 수석 부지부장으로 8년쯤 되니, 당연히 지부장 후보로 추대된다. 한국 외국기관 노동조합 군사지부 제5대 지부장, 각 부서에서 선출돼 온 대의원들로 간접선거를 통하여 지부장을 선출하게 되었다.

평소에 나와 상대도 안 되든 경쟁자가 선거 3일을 앞두고 나를 “경상도 출신”이라는 네거티브 작전으로 모략을 하니 몇몇 대의원들이 하루 밤 사이에 돌아서 나를 배신한 때문에 근소한 표 차이로 지부장에 선출되지 못했다. 군산생활 중 처음으로 맞본 고배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로, 그래도 사측은 여전히 나에게 애정을 간직하여 주어서 후일 군산비행장 한인 직원 중 가장 높은 직위인 11급 공보관 자리로 이동할 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