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친선의 중매자로서의 예우를 받다.

                          

         前 남도국 공보관  

미 공군기지 사령관 (미공군 준장)의 현지인 보좌관인 공보관은 사령관의 대외 업무의 모든 것을 보좌하고 자문한다. 통·번역 업무는 물론 간혹 사령관을 대신하여 국방부, 공군본부, 주한미군사령부, 지역 관공서 혹은 민간단체 리더들과 만나 업무도 협의한다.

군은 인접지역에 적대적인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없어야 한다. 유사시 작전에 이들이 어떤 피해를 끼칠 지 모르기 때문에 평소 지역주민들과 유대강화에 최선을 다한다.

가끔 울진원자력도 지역주민들과의 유대강화를 위해 유력인사들을 초청하여 선진외국 발전소 견학과 관광을 시켜주는 것으로 안다. 마찬가지로 주한미군도 미군과 미국을 홍보하기 위해 비슷한 초청행사를 한다. 이러한 행사의 인솔자도 공보관의 몫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군산시의 시장, 군수, 경찰서장, 상공회의소 회장, 체육회장, 한미친선 회장 등 지역 유력인사들을 인솔하여 미 공군의 요새 알라스카 엘맨도프 공군기지를 방문했다. 여기서 미 공군의 전략 방위작전을 설명 들은 후 알라스카로 이동하여 2박 3일 간 후히 대접받으며, 백야의 땅 정취를 만끽토록 해 탄성을 올리도록 만든다.

또 한번은 1998년에는 한미 친선골프 회원 10명을 포함 기관장과 20여명을 초청하여 미 공군 특별기편으로 괌 (미국령) 앤들슨 기지의 미공군 태평양 지역 전쟁물자 야적장 견학이었다. 돌아오면서 또 일본 남단의 섬, 오끼나와 카디나 미 공군 전투기지에 들렀다. 이 여행에서도 나 자신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두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회에 상세하게 기술코자 한다.

한·미친선을 위한 지역민들과의 만찬은 연 4회 정도 매년 계속되고 있는 데, 어느 한쪽에서 다른 쪽의 40여명 정도를 초청한다. 정기적인 만남외에도 지역민들과의 유대는 한 달에 몇 번씩이나 지역민들로부터 초청받을 때도 있고, 부대로 초청할 때도 있다.

이 모든 일에는 현지인 공보관을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공보관은 한·미친선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과 함께 운동, 낚시, 등산, 골프를 즐기면서 친선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미군측에서 개최하는 행사는 만찬 전에 새로 도입된 장비나 무기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연극, 만담, 노래, 춤 같은 것도 전문가 못지않은 수준으로 관객들을 감동시킨다.

그들은 미국 본토에서 수송해 온 스테이크, 세계 제일의 요리라 일컫는 재비집요리, 죽순요리, 대게요리, 채소, 와인, 양주 (시바스, 조니 워커) 등으로 먹고 마시며, 정도껏 취하여 행사를 즐긴다.

한국 측에서는 주로 불고기와 한정식과 소주로 대접한다. 전주 등지에서 초청한 판소리 명창, 가야금 연주, 어린이 합창단, 시립 악극단 등을 주로 연주하고 흥을 돋운다. 작은 선물도 교환하는데, 한국측은 전통부채나 항아리 혹은 붓글씨나 그림을 선사하여 반만년 역사와 문화의 서정적 사고를 이해하게 한다. 미 측은 주로 한미친선 배지나 기 등으로 답례한다.

미군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식은 궁중요리와 전주 비빔밥이다. 주말이면 버스를 이용하여 30분 거리인 전주로 이를 먹으러 다녀오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여기며, 한국인의 근면성을 보고 놀란다.

미군장병들이 군산비행장에 배속 받아오면 오리엔테이션을 받는다. 지역민과 접촉요령, 대중교통 이용방법과 운전자 준법사항, 유흥시와 술마실 때, 초대를 하거나 초대를 받았을 때의 대응 등이다. 이 교육을 받은 미군들은 대체로 잘 따른다. 

그러나 수천명의 젊은 미군들이 사건`사고 없이 임무를 완수할 수는 없는 일, 자고 일어나면 사건·사고다. 이럴때마다 나는 항상 사령관을 보좌하여 현장에 달려간다. 전투기마저 추락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

군산 미공군 소속 전투기가 울진지역에서 추락한 적도 있었다. 전투기 추락은 그 조사기간만도 한달이 걸린다. 나는 현지텐트 속에서 잠을 자고 씨레이션으로 끼니를 때우며, 기관과 민간인에게 연락하고 통역하여 뒤치다꺼리까지 마치고야 귀대한다.

나는 미공군 군산비행장 헌병대, 안전처, 공보처 등에 43년간 일해 이 기간 동안 군산기지 미공군과 관련된 사건`사고의 절반은 아마 내 손을 거쳤다. 기지 밖에서 일어난 미군들의 자동차, 오토바이 운전 중 사고는 물론, 술먹고 놀다가 발생하는 사소한 사고`사건까지도 내가 나서야 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원인제공을 자기가 하고서도 사건을 호도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럴때 힘들었다. 조사결과 자기측에 불리하면 언론에 흘리거나 민간 시민단체와 연합했다. 심지어는 시위대가 부대 철조망을 넘어 들어와 “주한 미군 물러가라” 며 막무가내 시위를 했다.

그들은 주로 공부하기 싫은 학생, 직업없는 사회 불만세력들의 전문 데모꾼들이었다. 어떤때는 시민단체들과 협력하여 부대 앞 광장을 메우고 군사작전을 방해하는가 하면, 숨바꼭질하듯 진압경찰이 도착하면, 언론에 전달해 줄 장면 연출을 위해 사진 몇 캇을 찍을 수 있도록 최후의 발악을 하고는 해산했다.

예의 시위를 주동하든 몇 사람은 내가 퇴직한 지 6년 된 지금도 매주 금요일 오후때면 그 자리에서 “미군 물러가라”고 한 시간씩 시위하고 있다 한다.

미육군 카투사에서 현역으로 2년, 미공군 군산비행장에서 문관으로 43년, 나의 황금기인 젊은 시절 45년을 미군과 함께 했다. 나는 과연 한 친구의 지적처럼 주한미군의 체질인가? 어쩌면 그렇게도 오랜 세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시비 한번 없었으니..

나는 강원도 울진, 감자바위 출신으로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다. 이렇다 하고 내놓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 임무만 떨어지면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헌병대에서 사령부 안전처로, 공보처로 승진 이동 할 때, 그들은 나의 학벌 없음을 전혀 탓하지 않고 경력과 능력만으로 나를 선택해 주었다.

미 국방성 장관은 1996년 4월 미공군의 날 펜타곤에서 나에게 세계 제일의 우수한 조직체인 미공군 최우수 공보관상을 주었다. 약 40년간 헌신적이며 책임감 있게 사령관을 보좌 업무를 잘 수행하여 대한민국의 안보유지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수상식에는 3,000여명의 참석자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나는 그 때의 그 감격스러웠든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설렌다. 국방장관이 감사패를 전해주며, 또 어깨를 안으며, 덩어리를 두들겨 축하해 주든 그 장면을 내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수상식 직후 다과회가 펜타곤 대회의실에서 열렸고, 미공군장관, 참모총장, 태평양 공군사령관, 주한 미공군사령관, 또 전에 군산 비행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고급장교들까지 모두 몰려와서 악수를 청하며, 나의 수상을 축하해 주었다. 이어 세계에서 단일 건물로는 규모가 최고 크다는 펜타곤 건물 1~3층까지의 내부 시설들에 대한 브리핑과 함께 관람시켜주었다. 그 다음 날 미공군 미녀 중령의 안내로 좀처럼 허가를 얻기 힘들다는 백악관을 방문하여 미대통령의 집무실을 관람한 후, 마침 중동사태에 관한 클린턴 대통령의 연설을 백악관 앞뜰에서 경청할 수 있었다. 

워싱턴 DC 투어 3일째 되는 날, 나는 미국 입법, 행정, 사법부의 주요건물을 걸어서 다 관람하였고, 그 다음날은. 링컨 대통령 기념관, 한국 전쟁 기념 동산, 월남 전 기념관 및 워싱턴의 주요 전시관, 국립 도서관, 박물관 등을 안내자의 안내를 받으며 4박 5일 간의 VIP 투어를 마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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