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집안, 형제 국회의원, YS정권 최고실세
평해출신 김명윤 옹 선영 돌보러 고향방문

          한나라당 김명윤 상임고문

 3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무얼까.

한국인들은 9라는 숫자에 대해 만족한다. 10을 채우지 않고, 1을 남겨두는 것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듯해서 경외심마저 든다.

그런데 우리는 또 3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 ‘삼세번’, 기회도 삼세번, 용서도 삼세번, 상을 줄 때도 3위까지다. 솥발 정(鼎)에서 느끼는 안정감 때문일까...
 

우리는 간혹 울진의 현대사에 3천재가 누구냐며 논란한다. 그런데 두 사람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지만, 아직 나머지 한사람에 대해서는 공감을 얻지 못해 삼세번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울진사람들이 공감하는 두 천재는 최익한과 김광준이다. 울진의 현대사에 내노라 하는 쟁쟁한 인물들이 많지만, 북면 나곡리 강릉최씨 집안의 석학 최익한과 평해 의성김씨 출신의 김광준 국회의원은 지금까지 알려진 울진의 인물들 중에서 그 천재성을 인정받고 있다.

지난 4일 청명·한식 때 평해 선영을 찾아 귀향한 김명윤(84세) 어른을 그의 본가에서 만났다. 그는 김광준 전 국회의원의 동생이다. 일년에 두 번 성묘를 위해 고향에 내려 오신다고 한다.

울진신문은 그동안 살아 생전에 울진이 낳은 천재 김광준의원을 모시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그의 동생을 통해서라도 그의 집안내력과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김명윤 어른도 그의 경력에서 읽을 수 있지만, 만만치 않은 분이다.

동경유학 후 일제시대 만주국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24세에 검사, 3선 국회의원, 보수당 당수, 6.10 민주화 항쟁시 김영삼 전 대통령 대리인, 현재 한나라당 상임고문이다.

그의 집안은 당대 국회의원만 10선이다. 김광준 형이 3선, 자신이 3선, 매부인 오준석 전의원이 4선으로 아마 한국정치사 신기록을 세웠다. 60년 5대 총선에서 김광준의원은 울진에서, 자신은 강릉에서 당선되니 한국최초 형제 국회의원이 탄생되었는데, 이들의 고향은 강원도 울진이었다. 

그의 부친(김두선, 62세 작고)은 본래 기성 다천 출신의 부유한 중농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에 대해 ‘조막손’ 어른으로 학문이 높았는데, 과거시험을 준비하시다가 요절하셨고, 부친에 대해서는 관대하시면서도, 정확하고 똑 바르게 살아가신 분이라고 기억했다.
 

유복자이셨던 부친은 현재의 평해읍 본가로 이사를 했고, 김명윤 어른은 4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특히 김광준 형은 명철하여 당시 동해안 최고의 갑부 집안인 울진 말루의 유씨 가문에서 막내사위를 삼아 동경 유학비를 대 주었다.
 

뒷따라 자신마저 부친을 설득하여 동경유학길에 오르니, 울진 일원에서는 명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맏형인 김광준의원은 일본대학 전문부를 졸업, 행정·사법 양과 고등고시를 패스하고, 울진에서 제헌의원부터 3선 국회의원을 했다. 

둘째는 누이는 김명분이고, 셋째가 둘째형 김명용이다. 그는 6,25사변후 부산에서‘동해실업’ 이라는 사업을 하다 서울로 옮겼다.
 

그런데 자신의 바로 아래 누이가 똑똑했다. 바로 오준석의원을 4선 국회의원으로 만든 김옥자이다.

그 밑에 동생 김광소는 6.25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퇴역하여 미국에 정주하고 있고, 막내가 김연옥 누이다.

김명윤 어른은 평해국교를 나와 당시 5년제였던 대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중앙대 예과에 입학하여 중앙대 법문학부 2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일제의 태평양전쟁말엽 학도 동원령의 발포로 국내 고등고시는 폐지되어 1944년 그가 20세 되던 때 만주 고등고시에 합격했다.

해방 후 2년간 사법요원양성소 과정을 마치고, 1948년 24살의 나이에 강릉검찰청 검사, 서울검찰청 검사로 재직하다 사직하고, 변호사사무소를 개업하여 정계에 진출. 5대, 9대, 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가장 힘들 때가 언제였느냐의 질문에 6.10민주화 항쟁 당시, YS의 대리인으로 양순직씨와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활동하다 딸들의 혼사를 앞두고 구속될 때였다고 회상했다.

판사를 잘 만나도 2~3년은 복역할 것 같았는데, 나라 걱정보다도 자식 걱정이 앞서더라는 솔직한 고백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정치가는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혁명가는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때 깨우쳤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1973년 9대 때 자신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아들 김경호(55세)가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큰딸 김정연은 서울대에, 둘째딸 김유정은 예술고(후에 이화여대 특대생)에 합격했을 때인데, 모두 한 해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제 생각을 해보니 1973년 3월3일에 태능육사컨트리클럽 7홀에서 홀인원(holl in one)을 했는데, 홀인원을 하고 나면 3년 동안은 운세가 좋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1남 2녀를 두고 있다. 아들은 재무부 차관보까지 올라 현재 필리핀 소재 아시아개발은행(ADB) 한국측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맏 사위 김권희는 미 MIT대학을 졸업하고, 고려대 교수를 하고 있고, 둘째 사위 주무진은 서울의대 박사로 개업의다. 
 

그리고 김광준 형의 자녀중 둘째 김준호는 현대중공업 출신으로 현재 사업에 크게 성공했다고 귀띔했다.

고향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물었더니 자신의 좌우명을 소개했다. “자신의 현재 자리에서 절대 불평불만을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 고 했다.
 

그리고 권력무상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이종찬씨에게 약 2천표 차로 지고 말았지만, 자신도 한국의 정치1번지라는 서울 종로에서 명함을 내밀 정도로 잘나가는 시절이 있었다.

권력이라는 게 본래 오만하기 쉽고, 잘난체 하기 쉽다. 권불십년이다. 권력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간다. 인심 얻고 권력을 동시에 누리기란 지극히 힘들다는 것.

금번 18대 총선을 바라보는 팔순을 넘긴 노인의 인생·정치경륜, 가장 나중에 가는 사람이 앞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여당의 상임고문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만, 한 때 정말 잘나가던 권부 실세의 등등했을 흔적은 단지 아직도 형형한 그의 눈빛에서만 희미하게 느껴질 뿐이다.

정말 권력은 무상한 것일까...
“저기 남대천 제방 밑이 빨래터였습니다. 문득 문득 어머니와 누이들을 따라가 냇가에서 놀던 때가 아련히 떠오릅니다.”
                                                     
                                                                                                            /전병식 편집국장

 

<김명윤(金命潤) 한나라당 상임고문 약력>

△1924년 평해 출신 △현(전)직 공증인가 한양합동 변호사 △직업 법조인-변호사, 정관계인-국회의원, 정당인 △시험/자격증 1945년 조선변호사시험 합격 
 
△주소/ 서울 서초구 양재동 1-26(성문빌딩 201호) △전화번호 02-572-9980 △학력 -1941 대구상업고등학교 -1943 일본 주오(中央)대학교 예과 졸업 -1946 (구)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 졸업       

△경력 : 1946 사법요원양성소 입소/ 1948 춘천지검 강릉지청 검사/ 1952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58 변호사 개업/ 1960 제5대 국회의원/ 1963 민중당인권옹호위원장·강원도당위원장/ 1963 보수당 당수/ 1973 신민당전당대회 부의장/ 1973 제9대 국회의원(강릉·명주·삼척 신민) 

1974 민중당 정책심법사내무위원장/ 1984 민추협 헌법특위 위원장/ 1985 민추협 부위원장/ 87 통일민주당 정무위원/ 1987 민주산악회 회장/ 1987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1988 통일민주당 수석부총재/ 1988 통일민주당 종로지구당 위원장/ 1988 통일민주당 총재직무대리/ 1988 통일민주당 총재대행·민자당 상임고문 

1988 세종연구소 이사/ 1989 국토통일원 고문/ 1990 민주당 상임고문/ 1991 통일원 고문/ 1992 무역진흥공사 이사장/ 1993 한국불교단체 총연합회 회장/ 1993 (현) 세종연구소 이사(유임)/ 1993 재경 대구상고 총동창회 회장 

1994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수석부의장/ 1995 21세기한중포럼 이사장/ 1995 헌정회고문/ 1995  장한나후원회 회장/ 1995  한일과거청산 범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 1996 국회통일외무위원회 위원/ 1996 신한국당 상임고문/ 1996 제15회 국회의원(신한국당 전국구) 

1997 한국불교단체 총연합회 회장/ 1997 제 15대 한나라당 국회의원(비례대표)/ 1998 국회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1998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회원/ 1999 민주산악회 회장/ 2003 한나라당 상임고문 

△수상/ 백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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