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월 만에 군산민항 건설하는 한국인 목격
영어회화 자원봉사로 교육부장관 표창 받아

     미공군 제8전투 비행단사령부
                  前 남도국 공보관
  
영어화화 자원봉사> 미군부대 지휘관은 주둔지역 민간인이나 기관들과 밀접하게 지내려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약 30여년 전부터 자원봉사자를 차출하여 지역민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게 한다.

군산시 교육청, 군산경찰서, 군산 YWCA, 군산세광교회, 기아특수강 군산공장, 구암동 현대아파트, 딩동댕 어린이집, 등등은 내가 영어회화를 가르치기 위해 출석하던 곳이다.
나는 시내 10여개 중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한 2학년생들 중에서 선발된 50명의 영재들을 대상으로 매주 화·목요일 18:00에서~20:00까지 운영하는 영어회화반에도 출석했다.

우수 학생들로 구성된 클래스로 기초가 튼튼한데다가 원어민들의 발음과 교육방식을 접목하니 아이들이 마치 물을 발견한 고기처럼 기뻐하며 실력이 향상되었다. 대부분 학생들이 우수한 실력으로 중학을 졸업하고 원하는 상급학교로, 직장으로, 전문가로 나아가는데 기틀이 되었다. 

미군은 나름대로 파송될 교사들을 엄선한다. 한·미 친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이 중대한 일을 맡아 일할 자는 우선 아이들을 사랑하는 근본이 있어야 하고, 그들을 가르칠 실력과 시간이 있어야 한다.

또 6개월 혹은 1년간 도중하차 없이 끝까지 책임져 주어야 한다. 대부분의 장병들은 일년간 복무하면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 황금 같은 시간을 쉬는 날에도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는 일에 보람이나 사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예 처음부터 포기시킨다. 

어떤 날은 독지가가 저녁식사를 대접해 줄 때도 있지만, 나는 대부분은 기지로 돌아와 밤 9시쯤에야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운다.  그러나 공부하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살아있고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향상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기아 특수강의 중역들은 모두 대학 이상을 졸업하고 해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로 구성돼 있다. 그들은 주로 일반회화로 토론을 하며 공부를 한다. 시사 이야기나 사례 등을 테마로 삼고 일주일 전에 미리 정하고, 그에 관한 자료나 책을 사전에 읽고 연구해 와서 약 60분 동안 토론하는 형식으로 공부한다. 

6개월간 했는데 그 효과는 엄청나서 군산공장 출신이 본사로, 미국 출장소장 등으로 발령 받아 갔다는 후문을 들었다. 한번은 구암동 현대아파트는 내가 살던 곳으로 당시 111동 대표 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소장님의 의견으로 처음에는 주부 20여명으로 구성하였으나 차츰 주부들은 이런 저런 핑계로 빠지고, 나중에는 여기저기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대학, 중고교 학생들로 30여명이 구성되었다.

이를 가르치는 강사도 마침 민간인 인사처장이 자원해 주어 강의가 열띠고 효과적으로 운영되어 약 1년간 하다 보니 지역의 유명한 변호사, 의사, 시청 공무원들도 참여하여 참 좋은 공부하는 장소로 이름하게 되었다.

내가 구암동에서 나운동으로 이사하던 1998년 겨울, 강사가 미국으로 발령받아 돌아가고 지원이 끊어져 이 학원도 문을 닫게 되었다. 또 세광교회는 무려 4여년 동안 잘 운영돼 왔다. 교회 자금으로는 한 푼도 지원이 없어 내 개인자금으로 중·`고`·대학생을 한 클래스로 묶어 일요일 오후 2시에 약 90분간 회화 위주로 운영했다. 

이런 일을 바쁘게 하다 보니, 나는 한국 교육부장관, 전북지사, 전북도교육감으로부터 표창장을 수여받기도 하였으며, 또 기아특수강, 대우 자동차, (주) 백화, 한국유리, 세광교회, 구암동 현대아파트 소장으로부터 감사장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지난 2월말, 내가 군산에 약 2주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어떤 젊은 청년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제가 1997년 여름, 군산시 교육청에서 영어회화를 교육받은 김 아무개입니다.  그는 군에서 재대하여 지금 전북대 영문과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한다.

별로 나이를 먹지는 않았지만, 혹시 나에게 한마디 하란다면 나는 지금 감히 자신 있게 말 하련다. “인생은 돈이 전부가 아니다, 그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군산민항 건설> 1987년 10월로 기억한다. 노태우 대통령후보가 군산유세 중, 느닷없이 군산에 12월말까지 민항을 건설하겠다고 선거공약을 한다. 군산비행장은 1950년 6.25 동란 때, 한국정부에서 미 공군에게 무료로 주둔하도록 허가하여 지금까지 주둔해 오는 곳이다. 

아무리 한국의 대통령 후보자라 하더라도 사전 아무 언질도 없이 갑자기 군산비행장 활주로사용료를 미군측에 지불하면 된다는 조건으로 공약을 하였고, 그 날 이후로 군산민항 건설사업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 다음날, 교통부 항공운영 담당자, 전라북도 지사, 군산시장, 대한항공 및 아시아나 항공사로부터 전화로, 혹은 사람을 보내 사전 예약도 없이 사령관을 만나게 해 달라, 전화로 바꿔 달라 난리가 난다. 

그런 일 생기면 나만 죽어난다. 아무리 긴급한 일이라 하더라도 미군측 입장에선 한국의 대통령이 미군 사령관의 명령자 일 수는 없기 때문에 그 분에게는 이 문제가 긴급한 문제로 최우선 긴급 업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상의하기 위하여는 당연히 평상 업무처럼 절차를 밟아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의제를 얘기해서 충분히 준비한 후에 자리를 함께 하는 게 도리이고 방법일진데, 한국 정부 측 관리들은 그저 나만 누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인 양, 연속 전화로 몰아붙인다.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비서에게 부탁하는 일인데, 돌아오는 답변은 사령관이 미리 예약한 바쁘고 중요한 다른 군 업무 때문에 그 시간에는 안 되니 다른 시간을 선택해서 연락해 달라는 것이다. “빨리 빨리” 문화가 여기서 또 한번 실현되는 순간인가? 

그 동안에, 사령관도 나름대로 사안의 심각성을 알아는 봤는가?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그 다음 날에 불러 내일 10시에 교통부 담당자들과 긴급회동 하도록 통지하란다. 하늘을 나를 듯 기뻤다.

 교통부 항공과에 연락하고, 전라북도지사실에 연락하고, 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다음 날 오전 10시 사령부 회의실에서 교통부 이사관, 사무관 각 1명, 전북도에서 1명, 군산 시청에서 1명의 고위 공무원들과 군부대에서 사령관, 작전 전대장, 시설 대대장, 한국 공군 전대장 등이 참석하였다.

점심을 미루어 가며 4시간 동안 회의를 한 결과, 깨끗하게 마무리 짓고 내일부터 당장 군산 공항 건물 건축공사를 시작하고, 군산 비행장 활주로 북쪽 끝과 민간공항 간의 연결 활주로 공사 구간 약 300미터를 12월 말까지 두 달 동안에 깨끗이 마무리 한다는 것이다. 

두 달 동안에 공항 건물을 짓고, 부대시설과 주차장 활주로 연결시설 건설을 마무리 한다는 것은 우리 한국사람이 아니면 이 지구촌에서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중앙 건설의 최우수 기술진과 장비들이 동원되어 밤 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그해는 추위도 일찍 와서 땅이 얼고 아스팔트가 얼면 포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미군 규정을 어겼다고 미군측에서 시비를 해 와도 아랑 곳 하지 않고 마구 밀어 붙였다.

 그 분들의 피와 땀과 힘과 능력의 결실로 드디어 군산민항이 그 해 12월말에 탄생했다. 전라북도민과 충남 서천군민 등의 숙원을 이루어 내는 대 역사를 창조하게 되었다. 그 날부터 이 일대 주민 약 1백만명은 서울로 제주도로 하늘로 날아서 다녔다.

누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하고 읊었듯, 나도 정신없이 군산민항 건설에 참여한 덕분으로 교통부장관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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