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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국 나의삶·나의 영광
제7편/ 1987년 한 해 전투기 4대와 3명의 조종사 목숨 잃어
2008년 07월 01일 (화) 14:43:48 [조회수 : 1594] 편집부 webmaster@uljinnews.com

   
 
 
 
 어떤 나라가 우리의 진정한 우방이란 말인가?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 땅에서 목숨 바쳐

1987년 7월의 일이었다. F-16E 전투기 한 대가 심한 장마비로 전방 50미터의 시야를 확보할 수 없어 활주로를 이륙하지 못하고, 관제탑의 명령에 따라 활주로 끝 부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 때 비행임무를 마치고 막 착륙하려던 또 다른 F-16E 기가 이륙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앞서의 F-16E 전투기의 뒤를 들이받았다. 이 충돌로 전투기 두 대는 폭발하여 화염 속에 휩싸였다. 

조종사들은 즉사했다. 그들의 시신은 기체와 함께 불에 탔다.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어 있었다. 이 사고는 사령부 사무실에서 거리상으로 약 300여 미터 떨어진 활주로 북쪽에서 일어났다.

기지 정문은 봉쇄되었고,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었다. 때문에 기지 내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더욱이 이 사고와 관련하여 상부에서는 언론통제명령까지 내린 상태였다.

안전처에 근무하던 나는 점심을 씨레이션으로 해결하고는 사무실에 앉아 전화도 못하고 그저 상부의 움직임만 지켜보고 있었다. 그같은 상황은 그날 오후를 지나 밤까지 지속되었다.
경찰서 외사계 및 다른 정보기관 등에서 혹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연신 물어왔다. 계속되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모르는 일이 발생 한 것 같은데 외부 출입을 금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 없다”는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이 일은 밤 8시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나를 비롯한 나머지 직원들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퇴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사건의 내용은 한국군 보안대, 경찰서, 신문사로도 흘러들어갔다.

그날 밤 9시 뉴스에 이 사건의 개요가 처음 보도되었다. 그 때 산화한 조종사 중의 하나는 계급이 소령이었다. 그는 제 80전투비행대대에 소속한 미공군 베테랑 전투기 조종사로서, 본부 비행안전 장교를 겸직하기도 했다.

그는 심성도 착하고 예의도 바르며, 특히 한국인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그와 매우 친밀했으며, 어떤 날에는 홍도, 흑산도 등지를 함께 1박 2일로 여행하기도 했다. 
주지하다시피, 조종사 한 명을 배출하는데 투입되는 비용과 노력은 실로 막대하다. 게다가 이런 막대한 비용과 노력 속에서 탄생한 조종사가 그 비행시간이 2,000을 넘는 베테랑 일 경우에는 그 몸값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많이 나간다.

눈 깜박할 사이에 내 몸 같이 아끼고 사랑하던 부하 조종사 둘과 사랑받던 전투기 두 대를 잃은 비행단장은 한 동안 옆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측은한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비행단장은 의연함을 잃지 않고 그의 임무를 착실해 수행해나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그날의 사고로 인한 그의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었는가 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 해 10월, 앞서와 같은 사고가 발생했다. 서해상에서 훈련 중이던 두 대의 F-16E 기가 어청도 상공에서 비행 훈련 중 공중 충돌한 것이다.

두 대 모두 어청도 서남쪽 2마일 지점에 추락했다. 두 대 모두가 서해에 박혔는데, 조종사 한 명은 다행히도 추락전에 낙하산으로 탈출하였으나, 나머지 한 명은 불행히도 탈출하지 못하고 기내에서 사망했다. 

이 사고는 미공군 비행 역사상 최악의 사고로 기록되었다. 이 사고로 해서 비행 단장은  그의 꿈, 치유될 수 없는 공군대장의 꿈(?)이 사망선고를 받는 큰 상처를 입었다.  

어청도는 육지로부터 참으로 멀었다. 100톤급 해경 경비정으로 네 시간여를 달려 도착하니, 어청도는 어두움의 문턱에 들어서 있었다. 도착 당일, 나와 일행들은 어청도의 현지주민으로부터 빌린 어선을 타고 사고현장을 확인만 하고 돌아와, 마을에 천막을 치고, 가져간 씨레이션으로 저녁을 적당히 때우고 잠이 들었다.  

어청도는 어민 100여명 사는 조그마한 동네이다. 한 마디로 거의 모든 것이 아쉬운 데였다. 우리는 부대에 연락하여, 한국민간 구조대(잠수 요원), 24시간 경찰의 긴밀한 협조, 필요한 야외 용 음식과 음료수를 지원, 요청했다.

다음 날 정오쯤 미군 지원병과 한국 경찰, 잠수부 그리고 이들과 함께 야외 용 음식과 음료수들이 들어 왔다. 사고 수습과 관련한 세부사항을 설명한 후, 우리는 그날 저녁 돌아오는 해경 경비정을 타고 귀대하니, 새벽 1시였다.

그들(미군)은 이렇게 우방국 방위를 위하여 일하다 죽는다. 그들을 위한 장례식은 본국의 부모와 친지들에게 연락, 초청하여, 일단 사고현장을 답사하게 한 후 부대 내의 교회에서 조용히 치러진다.

이 장례식에서는 부모들의 슬픈 오열도 가슴을 심하게 후려치는 모습도 볼 수 없다. 요컨대 그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국토방위를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전사하는 일을 군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론에 보도를 하거나 민심을 자극하는 등의 행위는 하지 않는다. 

철저한 애국심! 나는 그들의 애국심에 대하여 항상 생각한다. 누가 진정 우리의 우방인가! 6. 25 사변으로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국인 한국 땅에서 목숨을 바쳤다. 그 당시에 우리와 맺어진 혈맹이 50년 넘도록 지금까지 끈끈히 유지되어 오고 있음은 우리의 자랑이며 영광이리라.

지금도, 우리가 알든 모르든, 미국의 젊은이들 가운데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다가 순직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정말 이 지구상에 어떤 나라가 우리의 진정한 우방이란 말인가?

강제로 합방을 하고, 물자를 착취하고, 자유를 빼앗고, 역사를 바꾸며 국어를 말살하는 정책을 쓰는 나라가 우리의 우방인가?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행위는 안 된다.  

나는, 부임 기간 불과 8개월만에 F-16E기 4대와 전투기 조종사 셋을 잃은 데 따른 상처입은 마음을 갖고 묵묵히 일하던 비행단장과 우리에게 상부가 어떤 조치를 내릴지 자못 궁금했다.

그러나 미공군은 비행단장에게도 부대원 누구에게도 불이익이 될만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특히 비행단장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는 비행단장으로 유임되었을 뿐만 아니라, 임기가 끝난 다음해 3월에는 하와이 미태평양 공군 사령부 극동지역 전략 참모로 발령 받아 이임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 한국의 방위 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본국의 명령을 받아 복무하는 군인들이다. 한국의 국토방위 업무가 최우선 업무다. 이러한 업무 외에도 그들은 또 휴식시간을 적극 활용하여 자선활동도 한다.

한국의 양로원, 고아원 등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협조하며, 병원 지원과 장비 및 인력 지원 사업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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