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와 건립연대

죽변면 봉평리에 비석 사적공원이 세워져 곧 개장된다. 즈음에 봉평신라비에 대한 문화재적 가치를 다시 살펴본다.

울진 봉평신라비는 국보입니다.(제242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시대에 세워진 비석으로서 당시의 6부촌과 관등명칭, 율령 및 제도등이 새겨져 있어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었습니다.

신라 6부라는 내용과 탁부, 사탁부, 본피부, 잠탁부 등의 6부 명칭, 금매왕, 갈문왕, 간지, 태아간지, 아간지, 일길간지, 거벌간지, 태라마, 나마 등의 관등 명칭과 대교법, 노인법 및 장령(杖令) 등은 활자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신빙성을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가 아니었다면 삼국사기의 내용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사학계의 의문이 아직도 논란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비가 발견됨으로써 삼국사기의 해석과 의문의 논란이 일거에 해결된 중요한 사료로서 문화재중 문화재인 국보로 지정된 것입니다.

이 비는 1988년 봄에 논바닥 속에 묻혀있던 것이 작업과정에서 발굴되었는데 흙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글자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어 판독이 가능한 398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갑진년(524년 추정) 정월 15일에 신라 6부 장들의 이름으로 벌교령을 내리고 사건의 관련자들을 처벌한 내용을 기록하여 재발을 방지한 경고문입니다.

당시 사건은 지방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신라 6부에서 군사를 동원 진압하고 수습한 내용입니다. 끝머리에는 만약 이와 같은 자가 또 있으면 하늘에 죄를 지은 것(若此者獲罪於天)이라 엄단하겠다 했습니다.

내용 중에 파단(波旦)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이는 향토사적 중요한 단서입니다. 부족국가 시대 울진의 지명이 삼국사기에는 파차(波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파조(波朝), 군지에는 파단(波旦), 파조(波朝)로 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且(차)는 旦(단)과 같은 자이며 파단의 旦자가 아침단자로 조선시대에 들어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이름자가 旦이기 때문에 이를 피하여 울진의 지명을 波旦에서 波朝로 변경하여 기록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원래의 지명 파단(波旦)은 봉평신라비에서 지명으로 나오고 있어 반란의 사건이 있은 후 지방민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 입증되는 사료입니다.

파단은 일본식 발음으로 ‘하타’이며 ‘하타씨(秦氏)’는 현재 일본의 거대 씨족 문벌로서 그들의 시조 설화에는 조선으로부터 건너왔으며 ‘하타’는 출신 지명 이라합니다.

일본의 사서(史書)『岩波新書』에 하타(秦)씨는 조선계 이주민으로 그들의 출신 소왕국명(小王國名)으로 성을 삼았다는 도래(渡來)설의 기록이 있고 [일본에 심어진 고대 울진의 얼:전관수] 2001.7.28 KBS 역사 스페셜로 하타씨의 시조 설화를 따라 일본의 하타씨 종중을 찾은 내용이 방영되어 일본 하타씨 시조 성지가 울진임이 봉평비에서 입증된 것입니다.

그 외 향토사적으로는 거벌모라, 아대혜촌, 갈시조촌 남미지촌 등 옛 지명과 일벌, 일척, 하간지, 사인 등 지방관등 명칭이 있어 중요한 연구 사료가 됩니다.

다음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건립 년대입니다.
비문 내용과 동일한 사건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파사왕 25년(104년 甲辰)의 기사입니다. 이 비의 甲辰을 사학계에서는 524년 甲辰으로 추정하였는데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7월이고 비의 건립은 甲辰 正月일뿐 아니라 율령은 법흥왕代 반포하였다고 정의하고 있으므로 법흥왕代인 524년 甲辰으로 추정하였다고 합니다.

正月에 대하여 문제를 삼아보면 이 비문의 정월은 一月이 아니라 12월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12월을 正月이라 썼다면 건립 년대는 524년이 아닌 104년이 될 수 있습니다. 사건은 7월이고 비의 건립은 12월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풀립니다.

삼국사기에는 1월을 春正月로 기록하였는데 비문에는 正月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중문대사전에 의하면 중국사서 春秋書例에는 每年 必書春王正月이라 했고 必書史本文也에는 王正月이라 했습니다.

또 역사기록의 正月은 당(唐)나라 은(殷)나라는 12월이 正月이고 주나라는 11월이 正月이라 하였고 (周以建子之月爲正) 하(夏)나라 한(漢)나라는 十二月을 正月로 하였습니다.(夏后氏漢皆以十二月爲正) 이와 같이 정월이 다양한 달로 쓰였으므로 봉평신라비의 정월을 1월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효소왕(孝昭王) 4년(695년)에 11월을 정월로(以立子月爲正) 하였다고 하였으니 비문의 正月은 1월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 깊이 연구되면 건립 년대가 달라질 것이라 희망해 봅니다. 영일의 냉수리 신라비는 503년 이므로 봉평신라비는 이제 신라最古의 비가 아닙니다. 냉수리비는 봉평비가 발견된 1년 뒤인 1989년에 발견 되었습니다.

글쓴이 : 울진문화원  향토사연구회 회장  윤 대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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