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고 ■ 역사의 흔적…우여산과 둔전을 찾아서


‘줄개’ 천혜의 요새지역, 둔전으로 개황된 큰 마을

스스로 사라지는 길을 선택했을까?

곳곳의 명칭과 전설만 남아...


       

▲ 임명룡(후포면 금음2리 출생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석사과정)

△후포면 금음리~온정면 덕인리 사이에 위치한 ‘줄개’ 

객지에 살다보면 고향소식에 민감해지기 마련이라, 울진신문을 통해서 수시로 고향소식을 살펴보는데, 며칠 전에는 조금 특별한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모某업체에서 온정면 덕인리에 대형 양계장 설립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6월11일, 울진신문 인터넷뉴스)

인편에 듣기로는 양계장 예정지가 온정면 덕인3리 일대로, 인근주민들이 ‘줄개[줄ː개]’라고 부르는 곳이라고 한다. 영덕군 칠보산과 울진군 마룡산이 해발 200미터 부근에서 만나며 자연분지가 형성된 곳으로, 금곡천과 여심천 그리고 삼율천의 수원지에 해당한다. 뉴스를 접한 필자는 그곳의 역사적 의미가 새삼스럽게 떠올라 울진신문의 귀한 지면을 빌려 기록하고자 한다.

   
▲ 둔전의 형태를 확인 할수 있는 위성사진

△‘줄개’에 둔전설치를 권하는 장계가 선조임금께 전달돼

조선왕조실록 선조조 57권, 27년(1594년) 11월 17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영해 북쪽 20리 되는 곳은 바로 평해의 지역경계에 정당正當되는 곳으로 이곳에 우여雨餘라는 산이 있는데, 산세가 험준하여 삼면이 절벽이고 오직 일면만이 통행할 수 있으며, 산속에는 시내가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합니다. 그곳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일 우여산에 산성을 설치하고 둔전병(屯田兵)을 두어 농사를 지으면서 지키게 한다면 관동(關東)의 적도를 차단할 수 있다.’ 합니다”하니, 왕이 “아뢴 대로 하라. 만일 그렇다면 이 일은 지체해서는 안 되니, 속히 처리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필자는 실록에 언급된 곳이 바로 ‘줄개’지역으로 보고 있다. 실록의 기록과 같이 울산에서 영해에 이르기까지는 요새要塞가 될 만한 곳이 없는데, 금곡천과 여심천 사이는 험준한 산악이 바다와 인접하여 요새로 부족함이 없다. 특히 금음3리(속칭: 여싐)의 뒷산은 바다에서부터 이어진 암벽이 가파르고 험준하여 적로를 차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또, 아계 이산해가 평해 유배지에서 쓴 해빈단호기海濱蜑戶記에는 ‘여음餘音’이라는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는 ‘여싐’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여산雨餘山의 ‘여餘’자와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그 산속에 3개 하천의 수원지(줄개)가 있으니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것은 당연하며 실록의 기록과 일치한다.

△효령대군 후손 이익무 만산에 입향

실록에는 더 이상 언급이 없으나, 구전口傳과 지명에 남아있는 어원적 근거 그리고 다양한 흔적들로 그곳에 둔전과 비슷한 형태가 존재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먼저, 종실의 후손 이익무李益茂의 입향入鄕을 통해서 근거를 살펴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조선의 인문지리 역사서인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울진군편의 ‘선행善行’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李益茂, 字 義彦. 號 晩山, 全州人, 孝寧大君 補后少尹鐥子, 性行敦黙, 文詞富贍. 惟有遯世之意 宣祖朝, 隱於, 箕城南, 萬山洞, 愛以泉 石導前墉 後官 通政.』

이글에 따르면, 이익무라는 사람이 종실의 후손이며, 기성(평해)남쪽 만산동으로 입향해, 샘을 관리하고 앞에는 돌로 보루를 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때, 만산동이라는 명칭은 이익무의 호 ‘만산’에서 마을이름이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

△과거에 ‘줄개’에는 이익무와 관련된 큰 마을이 있었으며, 조선후기 행정구역은 평해군平海郡 남면南面 만산동萬山洞이었다.

지금의 ‘만산’은 가구 수 10여호에 주민 20명 정도가 살고 있는 자연부락으로, 마룡산 비탈에 경사를 따라 형성된 작은 산골이다.

   
    ▲ 비변사인방안지도
서울대규장각에 소장된 조선후기의 군사요충지가 표기된 비변사인방안지도에도 비슷한 위치에 평해 남면南面 만산萬山이 나타난다. 하지만 지도에 표기된 만산은 이익무가 정착한 곳을 의미하며, 지금 만산마을은 그 터의 일부 혹은 그 터에 소속된 자연부락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만산마을 동제洞祭 제문에서도 유추할 수 있으니, ‘유세차 모某년 모某월, 이씨李氏터전에 임씨林氏골목, 골마님께 제를 올립니다.’로 시작된다.
 원래의 ‘만산동’은 ‘줄개’에 있었다. ‘줄개’라는 지명은 ‘산성山城’을 의미하는 ‘주흘’에 조사 ‘엷가 붙어서 형성된 사투리다. ‘줄개’의 앞쪽(동해방향)에는 토성의 흔적이 있으며, 승람에 기록된 ‘石導前墉석도전용, 앞에 돌로 보루를 쌓았다’라는 구절과 연결이 된다.

또, 그 지역을 ‘재미[재ː미]’라고도 부르는데, 발음에 근접한 고어는 [지뫽이]이다. ‘지’는 기와器瓦의 고어로, ‘디새>지새>지>지애’로 변했으며, ‘뫽이’는 입구나 장소를 뜻한다. 즉, ‘재미’는 ‘기와골’이나 ‘기와골 입구’라는 뜻이다. 실제로 그곳에는 기와 파편들이 다량으로 발견되며 일설에는 기와 공장이 있었다고도 한다.

정상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재미 펀들’이라는 잔디광장이 있었는데, 동해와 후포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둔전이 설치되었다면 집합소 역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외에도 인근에 ‘부터골富土谷’이라는 곳은 ‘부자들이 살았던 터’를 의미하며, 일제초기까지 종실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마을이 사라지면서 유적·유물들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또, 금곡천에 있는 ‘종지비’ 마을은 원래 '종지뱅이宗地方,宗地邊(영덕군지 병곡면편)로 ‘종실땅의 변방’을 뜻하니 이익무의 입향과 밀접한 이름이라 하겠다. 덧붙여서 ‘줄개’에는 ‘정지앞’ 혹은 ‘종지앞’이라는 곳도 있으니 ‘종지변’과 상응하는 이름이다.

△‘줄개’ 마을 앞산이 ‘우여산’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줄개’에서 ‘여싐’ 뒷산으로 이어지는 등성이(여심천 좌측)에는 일찍이 폭이 2미터가 넘는 도로가 있었다. 마을도 없고 농지도 없는 등성이에 도로가 있었다는 것은 요새와 둔전을 염두에 둘 때, 비상시 병사들이 이동하여 적을 막기 위한 차단로였단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만산마을에서 보면 그 등성이가 한눈에 들어오며, 마을사람들은 ‘유리실 등’이라 부른다. 필자는 ‘유리실’의 어원이 ‘우여雨餘실(谷)’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리말 '-실'은 [실ː내(絲川)]에서 온 말로 실과 같은 계곡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지명 뒤에 '-실'이 붙어있는 곳은 반드시 시내가 흐른다.
따라서 ‘우여산雨餘山’ 계곡에서 흐르는 ‘시내’를 ‘우여실’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고, ‘유리실 등’의 어원도 ‘우여실 등’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둔전의 병사들 사이에서 암호를 부르는 ‘소리’에 대한 흔적들이 전설로 남아있다.

 ‘유리실 등’은 ‘여싐’ 마을 뒷산과 ‘만산’ 마을 중간에 해당하는데, 가마가 굴러서 시집가던 처녀가 죽었다는 이야기나, 상여가 굴러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짐작컨대 험한 산등성이에 그만한 도로를 건설하다보니 사상자들이 많이 발생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전설들이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한밤중에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특히, 비가 내리는 날이면 선명하게 들리는데, 처녀 목소리로 “오~너~!(오는가!)”, “가~너~!(가는가!)”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그 소리는 만산 마을에서도 들린다는 설이 있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만산 마을 뒷산(마룡산)에도 ‘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마룡산에는 속칭 ‘장구바우’라는 널찍한 바위가 있다. 그 곳은 옛날부터 동네 아이들이 메아리 놀이를 즐기는 곳인데,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가 ‘꼬치장(고추장)~ 다너(달콤한가)~!’이다.

또, 울진군지에 기록된 온정면 덕인3리 속칭 ‘조씨리’ 마을의 유래를 살펴보면, ‘400년전에 창녕昌寧 조씨曺氏라는 선비가 정착할 곳을 찾던 중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한 소년少年이 있기에 그와 함께 의논하여 이곳에 정착하니 인홀불아人忽不兒라 이곳이 길지吉地라 생각하고 마을을 개척하여 소산리召山里라 하였고, 후세後世에 조씨曺氏가 개척한 마을이라 하여 조씨리曺氏里라고도 한다.’(2006년 발행 울진군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마을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는데, 조씨리 마을은 ‘장구바우’ 바로 뒷마을이다. 정리하면 ‘여싐’의 뒷산과 ‘유리실 등’ 그리고 ‘만산’의 뒷산과 ‘조씨리’ 마을은 소리로도 연락이 가능하며, ‘오~너~!, 가~너~!’ 혹은 ‘꼬치장 다너~!’하는 소리는 당시의 신호체계일 가능성이 있다.|

△오래된 쇠 창槍이 발견된다.

또, 만산 마을에서는 아주 낡고 오래된 창槍을 보유하고 있는 집이 더러 있었다. 길이 2미터 정도의 나무막대에 20cm 크기의 쇠촉이 박혀있었으며, 필자가 본 것으로는 세 개인데 모두 비슷한 크기였다.

한편으로 그런 쇠창과 둔전 개간에 필요한 농기구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대장간도 몇 군데 생겼을 것이다. ‘울진군지 금음3리 여싐 마을편’에는 ‘신라 말기에 마을 가운데에 대장간이 있어 낫, 도끼 등을 만드는 쇠망치 소리가 밤, 낮 끊이지 않고 난다 하여 야음(也音:여심이)이라 하였다고’하는데, 어쨌든 둔전이 개간될 때 쯤 ‘여싐’에서는 밤낮으로 쇠망치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곳이 어떻게 선조임금께 알려졌을까.

아계 이산해는 영의정으로 있다가 임진왜란 때 탄핵을 받고 평해에 유배되어 만3년을 평해 주변에서 보냈다. 그는 둔전 개황에 대해서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아계유고 제5권 차류箚類는 그가 선조임금께 올린 상소문들을 모은 것인데, 차자마다 빠짐없이 둔전 개황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뢰고 있다.

또, 그가 관어대觀魚臺(영해 괴시리의 지역 이름)를 바라보며 지은 시가 있는데, 내용을 보면 평해 유배 중에 영해 주변까지 둘러본 것으로 보인다. 둔전에 해박했던 그의 눈에 문제의 그곳이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1592년 당시 병조좌랑이었던 황여일이 잠시 고향을 방문했다가 유배 중이던 이산해를 만나고 돌아간 일이 있다. 그는 이산해를 찾아가 아버지를 위해 집을 지었으니 헌기 한 수 부탁을 드렸고, 이산해가 써 준 글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해월헌기海月軒記’이다. 황여일과 이산해의 그러한 관계에서 우여산 둔전 개황의 단초가 제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맺음말

지금까지 추정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울진군 후포면 금음3리에서 영덕군 병곡면 금곡1리 사이에는 우여산이라는 지명이 있었고, 그곳에 둔전을 설치하여 왜군의 침입을 대비하라는 비변사의 장계가 임진왜란 중 선조임금께 전달되었다. 그 후 이익무가 속칭 ‘줄개’에 입향하여, 그 주변을 요새화하고 둔전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그 마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이라는 책에는 신돌석이 항일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적은 돈이나마 만산동의 지원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그 사건과 더불어 일본 침략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역사적 의미로 보아, 일제가 곱게 두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곳이 최근 울진신문에 실린 양계공장 예정지 주변이며, 필자는 사라져가는 흔적이 아쉬워서 조급하게 기록을 모아보았다. 그러나 추정에 의한 것이 많고 실체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단서가 되어 점점 더 많은 사료들이 발굴되고 그래서 실체가 온전히 기록으로 남기를 바란다.

 기고 임명룡(47, 후포면 금음2리 출생, 성균관대 儒學大學院 석사과정중)
 편집 정낙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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