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향인 ■ 한국에어브레이크 (주) 대표 윤 종 규씨


▲ 윤종규 대표

IMF때 동종기업 모두 부도

윤 대표만 건재

고향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원남회장도 2년 역임

이상 기온으로 찜통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리며 불쾌지수를 높이고 있다.

한낮의 열기를 피해 땅거미가 홑이불이 되어 슬금슬금 도심의 지붕을 덮어오는 저물녘에 출향인 윤종규님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서둘러 회사의 문을 나섰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나는 그에 대한 기대감으로 까닭 없이 마음이 부풀고 설레었다.
처음 하는 인터뷰도 아닌데 전에 없이 드는 이 야릇한 심사는 어인 일인가? 그는 지금까지 내가 접하지 못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CEO이자 가수라는 양수겸장의 알뜰한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약속 장소까지는 같은 서울 구역이지만 물경 한 시간 반이나 소요된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내 나름으로 그에 대한 인상을 떠올리며 몇 가지 질문 사항을 만들었다. 그러나 가급적 형식에 매이지 않고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인터뷰 대상 인물인 윤종규님은 예상과 달리 과묵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첫인상과 달리 그는 인터뷰 내내 매우 쾌활하고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달변가였다. 그의 언변에는 확실히 사람을 유인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나는 그가 지닌 천부적 재산이 부러웠다.
다음은 그와 두서없이 나눈 대화를 문답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요새 근황이 어떠십니까?
▶ 무척 바쁩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가수이자 사업가입니다. 체질상 무엇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유전인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자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 일에 만족합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고향의 독자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저는 울진군 원남면 금매 2구 몽천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막내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지요.
6. 25 동란 시에 유일한 아들이었던 맏이가 행불되자,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어머니는 당년 48세에도 불구하고 저를 가져야 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나의 기구한 탄생이 훗날 가수의 운명을 살 수밖에 없었던 배경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더러 해보곤 합니다.
이렇게 태어난 저는 ‘매화초등학교 37회 졸업’을 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죽변상고’를 다녔습니다.
죽변상고 재학 중 부산으로 전학을 하였고, 졸업 이후 1975년 서울시 공무원 시험에 응시, 서기보에 합격하여 12년간 종로구, 중구, 강남구 등을 두루 거쳐 녹지과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

1987년 4월 퇴직을 했는데, 퇴직 시 직속상관이 사표수리를 해주지 않아 두 달이나 대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공무원이라는 좋은 직업을 두고 사업을 한다고 하니 그분께서 그것을 한심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더군요.

우여곡절 끝에 퇴직을 했고 이후 바로 수원으로 내려와 10여 평 정도의 도금회사(자동차 브레이크 표면처리 과정)를 인수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이제는 브레이크를 제작하는 회사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 2000년 초였습니다.

현재 저는 5톤 이상의 버스와 트럭에 장착하는 종합 브레이크 회사인 ‘한국에어브레이크 주식회사’(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구장리 소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대지 2000평에 공장 700평 직원 수가 8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회사를 일군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없지 않습니다. 브레이크에는 라이닝(유압)브레이크, 캘리프 브레이크, 에어 브레이크, 드럼 브레이크 등이 있는데요, 지난 IMF 때 모든 브레이크 회사들이 부도가 나서 도산했습니다.

제가 인수한 ‘에어 브레이크’만 살아남았습니다. 행운이라면 행운인 셈이지요. 현재 브레이크 수출은 총판을 통해 하고 있으며, 중국 저장성 ‘링보 공장’에서는 OMA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밖에 계열사로는 20명 직원의 유한금속, 에스티 케이(주)가 있고, 수원 영통지구에 300석 규모의 한우 음식점(옥호: 윤황소 고집)을 생질에게 주어 경영하고 있습니다.

기업체 CEO가 어떻게 가수를 겸하게 되었나요?
▶ 고향 독자들이 궁금해 할 이야기인데요, 노래를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서입니다. 2005년 어느 날 개인 교습소에서 취미생활로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동호인 활동으로 이어져 오던 중, 우연한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노래 한 번 해보시오’ 농담 삼아 권하였던 게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어 색소폰 대신 노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연에서 비롯된 것이 필연의 결과를 낳게 된 셈이지요. 그해 한국 트로트 가요제에 곡 <장대비>로 출전, 창작곡 부문 <금상>을 차지하게 되어 팔자에도 없는 가수가 된 것입니다. 물론 가수협회에서 준 가수 회원증도 받았고요. 

박성훈 작곡가(전국 노래자랑 심사위원이자 딩동댕 담당자)에게 <내 사랑 당신> <동해바다> 등 곡을 받아 라디오에도 노래로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3월, 7월에는 ‘KBS 가요무대’에 2회나 출연하였고, 이달 8월 2일 ‘전국 노래 자랑’에도 출연하여 <동해바다>를 불렀습니다.

저는 사업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바쁜 와중에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이만큼의 성취를 이룬 것도 따지고 보면, 고향의 음우(蔭佑)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07년과 2008년에는 ‘원남 면민회’ 회장을 맡아 소임을 다했으며, 지금도 고향사람들 모임이라면, 만사 제치고 출석하고 있습니다.
 
윤종규 님의 자전적 생애를 듣다보니 인간 승리가 따로 없군요. 무엇보다 긍정적 사고와 도전적 정신, 자기 개발을 위한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는 님의 생활 태도가 인상 깊었습니다.
늘 강건하셔서 오래토록 고향 사람들에게 귀감의 삶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 제 변변찮은 이야기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늦은 밤, 나는 마음이 풍요해짐을 느꼈다.
또한 청년으로 돌아간 듯 불끈 생활에 대한 의욕이 솟아올랐다. 그가 동향인이라는 것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변한다. 사람의 바이러스만큼 강한 전염성이 어디 있을까? 인터뷰 도중 나는 그에게 감염되었다.
그와 더불어 나도 여생을 숯불처럼 뜨겁게 살 자신이 생긴 것 같다.
                                                            서울지사장 방남수 hwanamb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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