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가족을 찾는 것은 천륜이자 인륜인데…


가족을 만나고 고향을 그리는 것은 천륜이자 인륜이 아니겠어요.

처음에는 북한을 탈출한다는 맘도 먹지 못했습니다.

나이 칠십둘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도문시에 도착한 것은 단지 47년간 떨어져 있던 남한 가족을 만나 보고 돌아갈 계획이었습니다.

도문시를 몰래 드나들며 보따리 장수를 하던 북한 아들 친구의 제의를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3일이면 된다는 말에 속아 따라나선 길은 어찌보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멀고도 먼 길이 되었습니다.

60년 세월이 지난 6.25는 내게 너무도 참담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47년 세월을 기다려 가족을 만났는데, 또 다시는 처자식을 못 볼지도 모르는 운명에 처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남한 포로 노동자들의 동요를 막고 광부로 부려먹기 위해 결혼정책을 썼습니다.
다른 포로들은 속속 장가를 들었지만, 나는 6년을 버티었습니다. 통일이 되면 남한의 가족 품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30세 때 북의 22살의 처녀와 결혼하여 2남3녀를 두었습니다.

연길에서 남한의 처와 외아들, 조카 3명의 가족들을 만난 것은 한 달이나 지나서였습니다. 그런데 한번 건넌 두만강은 다시 건너갈 수 없었고, 만일 돌아간다 하더라도 죽음이 기다릴뿐이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워 북한 당국이 눈치를 챘을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같이 경원에서 광부 생활하던 남한 출신 포로들 4명과 같은 마을 아주머니 세 사람이 탈북하여 이곳을 다녀갔습니다. 그 분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내가 북을 떠난 후 북에 남아있던 전 가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심지어 출가를 했던 두 딸마저 그 가족들은 남겨두고 어디론가 데려가 소식이 끊겼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내게 있지 처 자식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원남면 신흥리 출신의 장무환(84세) 옹은 12년전 귀환했다. 본래 가난한 집안이었는데, 홀로 갖은 고생을 하여 아들 하나를 키우며, 47년 세월을 수절하고 기다리던 할머니(82세)와 재결합하여 매화리에 살게 된 지 12년이다.

그는 6.25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불과 14일전인 7월 13일 철원 금화전투에서 중공군에 잡히고 말았다. 전투에 투입됐던 같은 중대 병력은 몰살했고, 휴대했던 240발과 탄환과 수류탄 5발은 다 사용하고, M1 빈총만 남았는데, 혼자 살아 남아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잠시 수개 중대 병력 규모의 남한 포로들과 함께 평안북도 금강석을 캐는 천마광산에 투입되었다가, 그 유명한 함경북도 아오지 옆의 경원(현재는 샛별군) 탄광에 배속되어 약 20년간 광맥이 끊길 때까지 탄을 캤다.

이후 함북 온성의 상하탄광으로 옮겨 약 15년간 일하고, 60세가 되어 집단노동에서 풀려났다. 주변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자신은 현장 광부때는 조장이었고, 퇴역하고도 산림초소 책임자로 개간을 하여 다른 사람들보다는 덜했지만, 굶주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남한에 오니 무엇보다도 먹을 게 많아 좋습니다. 그리고 자유가 있어 좋고요. 북한에서는 어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고, 특히 정치적인 발언은 전혀 자유가 없습니다. 3~4명만 모이면 그 속에는 밀정이 있습니다.

특히 남한군 포로 출신에게는 감시 감독이 철저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밤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귀향하여 얼마되지 않았을 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드러내 놓고 욕을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북한 김일성이에게 쌀퍼주는 김대중이는 빨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나중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맘 대로 할 수 있는 그것은 자유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이 자유를 위해서 동족상잔을 벌였고, 지금도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빨리 통일이되기를 소망합니다. 북한의 처자식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나 눈을 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그에게는 6.25의 생채기가 아물지 않고 60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전병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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