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현대사 울진의 두 천재는 최익한과 김광준이다.

울진의 현대사에 내노라 하는 쟁쟁한 인물들이 많지만, 북면 나곡리 강릉최씨 집안의 석학 최익한과 평해 의성김씨 출신의 김광준 전 국회의원은 지금까지 알려진 울진의 인물들 중에서 그 천재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또 한사람을 추가 한다면 누구일까! 본사에서는 최순열(71세)씨를 추천한다.
그는 노음초, 울진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보성고를 1등으로 졸업하여 당시 서울대 법대보다도 입학생 수준이 월등했다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19명을 뽑는 공화당무요원 시험에 전국 수재 1,100여명의 경쟁을 뚫고 합격하여 39세 젊은 나이에 공화당 청년국장 재임 중이던 78년도에 그는 무소속으로 울진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고배를 마셨다.

10년 뒤인 88년 두 번째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그러나 언듯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더라도 그의 성장과 입지, 가족사, 학업과 생활, 정치와 인생사에 우리들이 겪지 못한 무수한 파란과 질곡, 그리고 기회가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가 현재 귀향하여 망양정에 청류헌(聽流軒)을 짓고 안거하고 있다.

본사에서는 그의 인생사를 약 60회 분량으로 장기 연재를 통해 느끼고, 배우고, 어떻게 인생역전의 기회를 잡아야 하는 지를 기록할 것이다.   

                                                                               편집자 주.


                            최 순 열
▣ 제1장 성장과 입지

57년 전인 1954년 12월 21일 새벽 4시로 기억된다. 울진발 대구행 버스를 타고 난생 처음 가출했던 날이다.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 소리와 안내양의 “오라이” 신호가 거의 맞물려 떨어지면서 자동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낯설고 물설어 어디에서 점심을 먹었는지, 버스타이어가 빵구 났던 동네 이름이 무엇인지도 생각나지도 않는다. 장장 13시간 대구역전 차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대구의 첫인상은 또렷하다. 걸어 다니는 사람보다 자전거 탄 사람이 더 많았다.

그 중에는 두 손 놓고 타는 사람도 많이 보였다. 자전거를 보긴 했어도 타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산 넘고 물 건너 7km 통학길을 비가 오나 눈이오나 걸어서 다니던 촌놈에게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역전 부근에서 간단히 국밥으로 저녁을 때우고, 밤 열차에 몸을 실어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해는 중천에 떴고 서울역이었다. 해는 눈앞에 보이는데, 동쪽은 등 뒤에 있는 듯하다.

대구역과는 비교도 못할 만큼 어수선하고 복잡하다. 버스보다 큰 전차가 전기줄에 매달려서 가고 있었다. 놀란 토끼의 모습을 한 나를 연상하면 딱 맞을 것이다.

나는 드디어 청운의 꿈을 펼칠 도시 서울에 입성한 것이다. 입지한 지 3년만의 일이다. 중학교입시 때 서울로 유학할 기회가 있었다. 제2회 “전국 중학교 입시 국가고시”에서 성적이 좋아 명문 “경기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시백 교장선생님과 하덕칠 담임선생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가족회의의 결론은 3년 보류였다. 중학교는 시골에서 다니고 고등학교 때 서울로 가라는 것이었다. 객지에서 공부하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나를 설득했지만, 여유롭지 못한 경제적 사정이 숨어 있었으리라...

순수 농사꾼 집안의 나는 부선망 준 유복자이다. 아버님의 타계는 내가 생후 7개월 반만의 일이다. 누님과 나 그리고 어머님을 남겨둔 채, 그렇게도 일찍 우리 곁을 떠나신 아버님 그래도 “양양농림학교”를 관비로 졸업하셨다. 자작농지 1,000평을 증여 받았기에 빈농은 면했지만, 나의 조기 서울 유학은 벅찬 것이 사실이었다.

돌이켜보면 아버님 돌아가실 적에 어머님 나이 겨우 22살로 지금 같으면 시집도 안 갔을 나이였다. 하도 기가 막혀 눈물도 말라붙은 어머님은 개가를 포기하시고, 우리 오누이만 믿고 정을 쏟으셨다. 설상가상 누님 마저 잃고, 오직 아들 나 하나만을 위하여 평생을 수절하셨다.

60일을 결석하고도 우등상장을 받아온 노음초교 일년생 아들을 보고 의아해 하시던 어머니. 희어멀건 무명바지 저고리에 검정고무신을 신은 아들이 입학 선서하는 모습을 보러 읍내에 오시지도 않던 어머니. 혼자 몸으로 일꾼을 부리며, 살림을 늘켜나간 억척 어머니.

두 큰집 사이에 끼워 넣은 단칸방 초가집에서도 잠시도 손을 놓지 않으시던 어머니. 해 떨어지면 주무시고, 해뜨기 전에 일어나시던 비구니 같은 어머니. 6.25 전쟁 중에서도 행인이든 피난민이든 빈 입으로 보내지 않으시던 어머니. 서울 “보성고”에 유학 보내 놓고도 장날 하루 도 빠지지 않으신 어머니!

“최순열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합격”이라는 지급 전보를 받고 상경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등록금 걱정이 앞서던 어머니. 600년 넘은 성황당나무도 뽑혀나간 “태풍 사라호”날, 온 동네 사람들이 뒷산에 올라 마을이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대성통곡 할 적에도, “아이고 하눌님! 집이사 떠내려가거나 말거나 우리 순열이만 잘 되게 해주소”하고 두 손 모아 빌고 빌던 어머니.
서울에 오니 친구도 이웃도 없어 삭막하지만, 평생 고질이던 해소 천식이 없어져 시골보다 좋다고 하시던 어머니. 돈암동 셋방에 모여 4.19를 모의하는 우리들을 보고, ‘모나면 정 맞으니’ 조심조심 행동하라던 어머니.

일자리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렵던 60년대 민주공화당 월급봉투를 들고 온 아들의 손을 잡고, “그동안 도움 주신 모든 이들을 부모같이 생각하고, 내복 한 벌씩 사드리라.”고 당부하시던 어머니.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던 시절, 셋째 손주를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시던 어머니. 외며느리가 밥상차려 봉양하기는 커녕 영어선생 한답시고 새벽밥 먹고 출근해도 자랑스러워하시던 어머니.

손수 키운 손녀가 시집들 가서 연거푸 아들을 낳자 대견해 하시던 어머니. 비록 외증손주들이지만, 노할머니 손에 커서 ”코 할머니“란 애칭으로 놀려대도 좋아라 하시던 어머니. 자식하나 치닥거리 하느라 여든 일곱해 고생만 하시다 가신 우리 어머니.

그 순진무구한 어르신께 몹쓸 짓을 한 불효자가 되고 보니 내 가슴속의 아려움은 더 오래가는가 보다. 출마, 낙마, 또 출마, 낙마, 거듭되는 아들의 좌절을 보고 고개 떨구시던 어머님의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선량이 되어 만인의 앞에 서서 일하려던 내 꿈의 좌절은 곧 어머님에게 ‘한’을 하나 더 심어준 꼴이 되었으니 어찌 불효자가 아니겠는가?

지금은 옛 살던 동네가 내려다보이고, 신작로가 확 트인 구리재 양지 바른 곳에 잠들어 계시고, 나 또한 그 산 발치인 왕피천 하구 망양정 정자 밑에 바다는 옆으로 하고, 강물을 바라보는 언덕위에 햐얀 집을 짓고 당호를 “청류헌(聽流軒) 이라하니, 다소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주민등록을 울진에 옮긴지 3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서울 가면 서울이 좋고 울진 오면 울진(고향)이 좋다.
비록 이루어 놓은 것은 없지만, 갈 곳이 있어서 좋고 올 곳이 있어 더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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