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문 논설위원
최근 필자는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김희곤,2001,푸른역사)이라는 책을 읽었다. 태백산 호랑이, 신출귀몰, 축지법의 도사 등으로 전해 내려오는 한말 평민의병장으로 일제에 항거, 눈부신 활약을 했던 영덕출신의 신돌석이란 인물을 새롭게 조명한 책이다.

그에 대한 사료가 극히 적은 탓에, 지은이는 신돌석의 고향 마을부터 당시 판결문과 신문 기사 등 모든 것을 직접 찾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1900년대 당시 한국의 의병활동 상황,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등을 사실적으로 썼다. 서른의 짧은 삶이었지만 지금, 그의 활동과 업적은 천추에 빛나고 있다. 영덕군에서는 신돌석 장군의 기념관을 건립하여 그 업적을 기리고 있다.

신돌석이 이끈 영릉의진의 활동은 울진과도 그 연관이 아주 깊다. 당시 영릉의진은 영덕, 영해,영양,청송,평해,울진,삼척,장호 등지까지 그 세력을 확장, 강고한 무장투쟁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더구나 검마산과 백암산의 독실(독곡),영양수비,선시골(온정선미),원남 갈면동,남회룡,불영계곡 등의 협곡을 이용, 동해안에 수시로 진출하여 울진, 삼척, 장호 등의 일본군경을 공격, 괴멸시키기도 했다.

그가 월송정에 올라 썼다는 남긴 시 한편이 다음과 같이 유일하게 전해온다.

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길을 잊고서 登樓遊子却行路/ 낙목이 가로 누운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可歎檀墟落木橫/ 남아 27세에 무슨 일을 성취하랴 男子二七成何事/ 잠시 추풍에 비껴 앉아 감회를 느끼네 暫依秋風感慨生.

27세에 이렇게 비분강개한 시를 썼던 의병장 신돌석은 30세에 죽었다. 그것도 일제가 내건 현상금에 눈이 먼 인척에게 처참하게 암살당하였다. 적은 내부에 있다고 했던가. 필자는 이 책을 읽고 해방이후 아직도 친일파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를 새삼 생각해 보았다.

한말과 일제 강점기 망국 조선의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고 오로지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독립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가까운 영덕군에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영덕 항일독립운동사’(2003년)를 펴낸 바 있다. 당시 강원도 산간 오지였던 울진에서도 타 지역에 못지않게 한말에서 8·15해방까지 고난의 항일독립운동사가 있다. 한말 울진의 의병활동, 일제 강점기 각종 단체의 구국 계몽운동, 3.1운동, 농민조합운동, 창유계사건, 조선독립당 사건 등 그 밖의 저항운동이 다수 있다. 이러한 투쟁으로 해방이후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분들이 72인이나 된다. 경북에서 안동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이는 당시 조선독립운동에 공헌한 울진인의 자랑스러운 증표이기도 하며, 아직 생존 독립유공자도 계신다.

필자는 한말과 일제 강점기 울진지역의 독립투쟁사에 관심을 갖고 논문 3편 (‘최익한의 생애에 관한 소고’ ‘주진수의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소고’ ‘생존 독립유공자 장영인과 조선 독립당’)을 지상에 발표한 바 있다. 이 논문들을 쓰면서 필자가 느끼는 바는 이들 기록이 각종 문헌에 흩어져 있다는 점과 기존의 기록과 언론 등에 보도된 자료를 검토 해본 바 다소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어떤 독립유공자의 경우는 직계 후손조차 불명이다. 따라서 더 늦기 전에 후손들의 구전과 남겨진 유품, 그 밖의 기록물들을 면밀히 재조사하여 새롭게 써서 집대성해야 한다.

Carr, Edward Hallett의 말처럼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이같은 관점에서 울진지역의 항일독립운동사를 새롭게 집대성하는 것, 이는 바로 단편적 역사적 사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혼을 불어넣는 통합작업이기도 하며, 미시적 울진지역사와 거시적 한국통사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독립유공자의 후손과 관계기관의 관심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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