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평생 살아오는 동안 가장 기뻤던 때는 언제였을까를 생각해 본다.

나에게는 50여년전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을 때가 무엇보다 기뻤던 날로 기억된다. 그것은 인생의 첫 도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성취감과 자신감에서 연유한 것이라 여겨진다.

서울 혜화동 1번지, 보성고 본관 적벽돌 베란다 벽에 나붙은 합격자 번호를 사촌누님과 함께 확인하고, 흥분과 감격에 찬 가슴을 안고 곧장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한시라도 빨리 고향 울진에 계시는 어머님과 백부님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보로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때부터 물들인 무명바지가 아닌 맞춤교복을 입고, 명문 사립고등학교의 교실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울진촌닭을 상상해 보라. 놀라서 긴장하고 마음 놓고 울기는커녕 모이활동도 엄두내지 못하는 오랜 시간이 흘러간다.

무엇보다도 언어의 장벽이 두드러졌다. 내가 모처럼 한마디 하면 까르르 하고 모두들 웃어 버린다. 그때만 해도 서울 토박이들은 경상도식 억양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해가 간다. 우리가 영어를 못 알아듣는 이치와 비슷하다. 글로 써 놓으면 해석이 되는데, 원어민 억양을 넣어 빨리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기가 일쑤이다.

학교에서뿐 아니라 친구집에 놀러가서도 마찬가지이다. 짜고 맵게 길들여진 입맛인데, 서울 음식은 싱겁고 달작지근하다. 그래서 “지랑물(간장)도 좀 주고 꼬치가리(고추가루)도 좀 주소.” 하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절대 못 알아듣는 것이다. 말하기가 주저되고 주눅 들고 줏대가 꺽인다.

더욱 기죽이는 일은 공부다. 영어도 수학도 따라갈 수가 없다. 격차가 엄청났다. 초등학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중학교 3년간의 격차는 정말 천지차이였다. 6.25전쟁을 격고 난 울진에는 선생님 모시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고, 중·고등학교가 신설이다 보니 노력봉사에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심지어 어린 중학생들의 운동장 고루기는 연중행사이고, 여름이면 학교농장의 퇴비용 풀베기까지 하였으니, 공부는 뒷전이 아니었던가.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교과서를 끝까지 배운 과목은 한 개도 없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공부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죄값(?)을 치르느라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지금 생각해도 눈시울이 뜨겁다. 처음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고 도중하차 하고 2류 학교로 밀릴 것 같은 불안감에 몸부림치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한 것이 독일어다. 독일어는 고등학교 들어가서 모두가 처음 배우기 시작하는 과목이다. 1년간 서울놈들과 겨루어 보니 출발이 같은 지라 뒤지지 않았다.

당장은 하발이지만 따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도 스쳐가는 느낌이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니 나도 우등생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학교 3년이 공부의 기초공사 과정이라면, 고등학교 3년은 인생의 기초공사 과정이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할 권리와 의무가 이 시기에 주어진다.

드디어 고3이 되자 문과(文科)냐 이과(理科)냐를 스스로 결정하란다. 나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문과를 선택하였다. 왜 그랬을까? 가난에 찌들고 권세에 눌리어 그야말로 춥고 배고픈 인생인데 팔자를 고치자면, 판`검사가 되든지 국회의원이 되든지 해야 답이 나온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문과반에 배속되면서 동시에 희망하는 대학과 전공학과를 적어보라 했다. 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라고 적어서 제출하였다. 진로가 보다 구체화된 고3 1년 동안 한눈 팔 사이 없이 공부에 열중했다.

당시 서울의 명문 고등학교에서는 입시지도가 치밀했다. 정규수업과는 별도로 대학입시 모의고사를 수시로 시행하였다.

우리학교의 경우 네 번의 모의고사를 본 것으로 기억한다. 정규시험 성적과 모의고사 성적을 함께 분석하여 진로지도를 해 주었다.

나의 경우 학년 초에 적어낸 서울대 법대 지망을 놓고 최종심사가 시작되었다.
심사위원 전원 일치로 통과되었다. 분위기가 좋았다. 그래서 나는 이때다 하고 숨겨둔 욕심의 발톱을 드러내 보였다.

“선생님, 실은 법대보다도 문리대 정치학과(지금은 정치외교학부)로 가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뭐. 그렇지 않아도 작년에 문리대 정치학과에 한 명도 입학시키지 못해서 학교 체면이 말이 아닌데 말이야. 원서 써 줄 테니 꼭 합격해야 돼.”

“고맙습니다. 제2지망은 어디로 할까요?” “제2지망? 마음대로 해.” “그럼 사회학과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의 문리대 시절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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