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정치학과에는 여학생 합격생은 없었으나, 대만에서 온 유학생이 한 사람 있었는데 도저히 벅찼던지 경희대학교로 전학가고 말았다. 우리 정치학과의 경우 신입생 60명 중 절반이 지방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서울출신 중에서 지방중학교를 거친 사람은 나 하나였다. 나는 자연스레 표준말과 사투리의 가운데 서서 가교역할을 하게 된다. 대인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급우간이나 선후배간에도 인기가 좋았다.

학내 선거철이 되면 후보자들은 나에게 몰려왔다. 내가 밀면 당선되었다. 3학년 초. 우리 중에서 과대표 한 사람을 뽑아야 했다. 경북고를 나온 윤 식군이 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지역 출신들은 나보고 하라 하고. 난처했다. 양보하고 윤 식군을 무투표로 당선시켰다. 정치지망생이 많은 정치학과에서 무투표 당선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선거얘기가 나왔으니 좀 더 해보자. 4.19학생혁명을 치루고 나니,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정부조직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내각 책임제로 바뀌었다. 문리대에서도 학생회 조직을 내각책임제로 바꾸었다.

각 과별로 인원비례에 따라 대의원을 뽑고, 대의원들이 모여 학생회장과 상임위원장 및 대의원 총회 의장을 뽑게 된다. 정치학과는 의예과 다음으로 많은 대의원을 배당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3학년에서는 나 한 사람만 당선되었다.

조각(組閣)은 할 판인데 나보고 먼저 한자리를 골라잡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두 자리를 놓고 몇 사람이 경합하겠다는 것이다. 망설이다가 명예욕에 불타는 재사들도 많은데 직접 할 것까지 없고, 나중에 더 큰 것을 탐내기로 하고, 대신 내가 조각권을 행사할 테니 따르겠느냐 하니, 모두 좋다 했다.

사학과에서 학생회장, 사회학과에서 상임위원장, 정치학과에서 1년 후배인 이청수군을 대의원 총회 의장으로 추천하고, 나는 상임위원으로 입각했다.

예산편성과 집행권이 상임위원회에 있었으니, 막후 실력을 행사하는 줄 알고 여학생회장이 찾아왔다.
민족통일을 어떻게 하면 앞당길 수 있을까 하고 초빙강사를 모셔놓고 대강당에서 열강을 듣는 중에 불려나가 여학생회 사무실로 들어섰다.

처음이다. 금남의 집이라 기웃거리기만 했지 들어가 본 사람은 없었다. 생각보다 넓고 우아하고 정감이 넘쳐흘렀다. 화학과 3학년의 경기여고 출신 이수자양이 회장이고 몇 명의 간부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여학생이 여러 명 앉아 있으니 오히려 얼굴이 덜 빨개졌다.

다과를 놓고 여학생 모임의 특수성과 발전방안에 대하여 난상토론을 벌였다. 미처 몰랐던 얘기도 나오고, 격조 높은 몇가지 구체적 방안이 제시되기에, 돕기로 약속했다. 예산이 확보된 다음 나는 한번 더 초대받고, 처음보다 더 많은 여학생들로부터 박수까지 받았다. 흐뭇했다.

단과대학별 학생회 조직이 완료되고,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구성인데, 꽤 난항인 모양이다. 어느 날 법대 학생회장 이하우군이 찾아왔다. 이 회장은 보성급우 조동창(영양의 조지훈 시인의 사촌)군과 가까워 전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총학생회장을 하고 싶으니 문리대 회장의 양보를 구해 달라는 것이다. 맨입으로 될까 했더니, 문리대 건너편 쌍과부 대포집에서 보잔다. 술기운인지 거간꾼의 입담인지, 문리대 회장이 협조해 주기로 했다.
또 한 사람의 후보가 더 있었는데 공과대학의 이태섭 회장이다.

이 회장은 우리 반의 한태열군과 경기고 절친이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사이였다. 이과계의 대표선수로 나온 것이다. 결국 문과계의 이하우 후보(울산이 고향이고 경남고를 거쳐 법대로)와 이과계의 이태섭 후보(수원 화성이 고향이고 경기중.고를 거쳐 공과대학으로)가 맞붙었다.

서울깍쟁이와 시골촌놈의 대결이기도 했다.
다시 한번 중재에 나섰다. 1년짜리 총학생회장인데 당락을 가려 한 사람이 독식하기 보다는, 한 학기씩 나누어 맡아 相生(win-win)하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 결국 4학년 1학기는 법대의 이하우 회장이, 2학기는 공대의 이태섭 회장이 총회장을 맡기로 했다.

이하우 회장은 주한 미 대사관 집 딸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가고. 이태섭 회장은 MIT에서 공학박사를 하고 귀국했길레(내가 청년국장 시절) 박사영입 케이스로 청년분과위원으로 함께 일한 바가 있고, 강남에 공천을 받아 주었더니 장관까지 되고, 원자력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으면서 울진에도 한두번 다녀갔다.

학내생활 얘기가 나왔으니 남녀공학에 얽힌 분위기를 소개한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유풍 탓인지 남녀 모두 숫기가 없었다. 우리네 남학생치고 여학생에게 스스럼없이 접근하고 접촉하는 학생은 실로 드물었다. 끝내 Campus Couple은 한 쌍도 나오지 못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얼굴이 익는데, 아는 척 목례라도 하고 지내자고 접근해온 여학생이 있었는데도, 마음에 들었는데도, 얼굴만 붉히다가 끝내 손목 한번 잡아보지도 못하고, 먼저 졸업하고 말았으니, 기회 포착에는 예나 지금이나 젬병이(낙제생)가 아니었던가!
용기부족. 우유부단.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오. 남 원망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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